9 문학 이야기

서로박: 짧은 만남과 오랜 이별, 첼란과 바흐만 (1)

필자 (匹子) 2018. 4. 16. 11:24

친애하는 J, 자고로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불가능한 사랑은 당사자에게 극도의 고통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하고, 주어진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기도 합니다. 파울 첼란 (1920 – 1970)과 잉게보르크 바흐만 (1926 – 1973)역시 죽는 날까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47년 초에 상대방에 대해 애호의 감정을 품습니다. 한 사람은 27세의 젊은 사내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21세의 처녀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불꽃은 순간적으로 격렬하게 타올랐지만, 주위의 거친 바람 때문에 마냥 꺼지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역사적 아픔 내지 비극적 상처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개인적 사랑은 어처구니없게도 깊은 역사적 상처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 출신의 망명객 사내라면, 다른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처녀였습니다. 아니, 한 사람이 유대인 탄압의 희생자인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히틀러에 충성하던 나치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어쩌면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정반대의 인간 유형이었는지 모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거의 절망적인 상처를 낳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부모님 집

 

바흐만은 1948년 5월에 부모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아이, 이국적인 실험 시를 쓰는 유명한 시인이 나를 사랑하나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건 너무 놀라운 일이거든 지금까지 책만 뒤지며 지루하게 살았는데, 그의 사랑 고백은 정말 나를 설레게 해.” 처음에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끼지 못한 연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환희였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생동감이었습니다. 바흐만의 방은 양귀비꽃이 즐비한 들판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전후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그미에게 찬란한 사랑의 꽃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은 그 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바흐만의 22세 생일날 바로 이 시집을 선물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대 곁의 낯선 무엇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야 해요./ 그대는 루트, 미리암 그리고 노에미 주위의 고통으로 그걸 꾸며야 해요.” 이때만 하더라도 첼란은 자신의 사랑 속에 얼마나 끔찍한 마약이 자리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양귀비와 기억”이라는 제목이 그 자체 얼마나 자신의 개인적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지 당시에는 스스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바흐만은 40년대 말에 빈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미는 한스 바이겔이라는 작가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8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40세였던 한스 바이겔은 오스트리아에서 문학 현장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22세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을 유혹하게 됩니다. 물론 그는 정치적으로 나치에 동조했으므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인적으로 고초를 겪지 않았습니다. 바이겔은 주위에 문학 서클을 결성하여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라이문트 커피숍은 문학 서클의 중심지가 되었고, 독일의 47 그룹과 합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오스트리아 나치 출신의 딸이었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던 터였습니다. 그렇기에 바이겔의 유혹은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습니다. 바흐만은 아무런 경험이 없는지라, 바이겔이 설치한 사랑의 덫에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흐만은 바이겔과 비밀리에 만나 달콤한 성을 탐합니다. 나중에 그미는 자신이 바이겔의 성적 노예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관계를 청산합니다. 한스 바이겔의 소설 『미완성의 교향곡 unvollendete Symponie』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은밀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잉게보르크 바흐만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하얀 꽃봉오리, 자신을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마음에는 연정이 타오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미가 나치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지요. 그미를 만나기 위해서 첼란은 경찰에 쫓기는 신분이지만, 과감하게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온갖 위험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고향, 체르노비츠에서 그는 나치를 피해 피신한 적도 있으며, 강제 노동에 시달린 적도 있으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술수와 음모를 이미 겪은 바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으므로, 첼란은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게다가 깊은 심리적 상흔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첼란은 여성들의 눈에는 이국적 매력을 풍기는 미남으로 비쳤습니다. 춤도 잘 추고, 여성을 유혹할 줄 아는 사내가 바로 첼란이었던 것입니다.

 

첼란은 처음에 빈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명작으로 판명되는 「죽음의 푸가」는 이미 루마니아의 언어로 고향에서 소개된 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권의 시집을 이미 간행했으므로, 신인은 아니었습니다. 빈은 첼란의 부모님들이 동경하던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는 부코비나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그는 대도시 빈에서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첼란은 빈에서 6개월 체류하다가 거주지를 파리로 옮기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첼란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름다운 문학지망생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1948년 봄은 두 사람에게 사랑의 시작을 알리던 시기였습니다. 아마 이 시기에 바흐만은 한스 바이겔과의 관계를 청산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파울 첼란에 대한 감정은 바이겔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이겔과의 사랑이 칙칙하고 음습하며, 달콤한 육체적 욕망으로 이루어졌다면, 첼란과의 사랑은 그미에게는 자연스럽고, 안온하며, 격정적인 밝음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첼란과 만날 때에도 그미는 주위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불과 한 달 뒤에 바흐만은 첼란에게서 깊디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1년 후에 바흐만은 체르노비츠 출신의 유대인 청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항상 당신을 걱정해요. 우리의 미래에 관해 많은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요.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검은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쓰다듬고 싶어요.”

 

그렇지만 두 연인은 출신, 종교 그리고 삶의 경험에 있어서 처음부터 철저하게 이질적이었습니다. 1949년 여름에 바흐만은 사랑하는 사내에게 다음과 같은 글발을 보냅니다. “내게 당신은 황무지이며, 대양과 같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온갖 비밀로 차 있으니까요.” 기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되는 것이라고는 시를 쓴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존재론적인 진지함 그리고 예술에 대한 파토스가 최소한 두 사람을 결속시키는 매개체로 작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1950년 가을에 바흐만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첼란을 따라 파리로 이사합니다. 이때 그미의 사랑은 첼란의 그것보다도 더 크고 격렬한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동거 생활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랑을 만끽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과 싸우면서 자신의 감정을 시작품 속에 형상화시킨 게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결혼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갔지만, 낯선 이국땅에서의 경제적 고통은 감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흔히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말하지요? 일상에서의 작은 갈등은 나중에는 불행의 씨앗이 되곤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관계는 몇 달 후에 끝나고 맙니다. 바흐만은 파리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로 이주합니다. 나중에 그미는 헤어진 이유로서 서로 숨을 쉴 곳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라는 말로 대답합니다.

 

 

 

 

오스트리아의 문예이론가. 한스 바이겔 (1908 - 1991). 그는 나이어린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내연남이었다.

 

그래, 두 사람을 갈라놓게 한 것은 어쩌면 궁핍한 일상의 고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고독한 삶에서 조우할 수 있는 갑갑함 내지 상대방의 편협함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에 바흐만은 극작가, 막스 프리쉬 (1911 – 1991)를 만나 사귀게 됩니다. 이때에도 그미는 스위스의 나이 많은 극작가에게서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을 절감하였습니다.

 

사랑은 아름답고 뜨거운 심장을 달구게 하지만, 임을 사랑의 감옥에 갇히게 작용하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사랑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합일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연인의 자유로운 정신과 개별적 자유의 감정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요? 어쨌든 빈으로 돌아온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의 심장의 일부가 끊어져나가는 고통을 느낍니다.

 

절망 속에서 첼란에 대한 사랑을 모조리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미는 함께 글을 쓰고 다시 만나자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첼란은 바흐만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합니다. 어느새 그는 보헤미안의 기질을 발휘하여 어느 프랑스 여인과 안면을 익히게 됩니다. 지젤 드 레스트란제라는 이름을 지닌 평범한 여인이었는데, 첫 번째 결별의 편지에 그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1952년 2월에 첼란은 편지를 보내어 앞으로는 서로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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