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서로박: 짧은 만남과 오랜 이별, 첼란과 바흐만 (2)

필자 (匹子) 2018. 4. 16. 11:26

 

 

 

첼란과 바흐만, 그들은 언제나 헤어져 있는, 그러나 항상 마음속으로 함께 지내는 친구이자, 연인이자, 동료이자 반려였다.

 

 

1958년에 두 사람은 우연히 독일의 부퍼탈에서 다시 만납니다. 이때 두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스치는 것은 아직 꺼지지 않은 사랑의 훈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흐만은 지난 6년 동안 마치 재능 있는 집시 여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동안 문학상도 여러 개 받았고, 여성 시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첼란은 그동안 지젤과 결혼하여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많은 재산이 있었으므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문턱에서 문턱으로라는 시집으로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부퍼탈에서 만난 뒤부터 첼란은 그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은 연애편지.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첼란은 뮌헨에 거주하는 바흐만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흐만이 그의 방문을 거절합니다. “당신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내와 자식을 저버릴 수 없을 거예요.” 첼란과 바흐만은 마찰 끝에 다시 헤어집니다. 말하자면 50년대 말의 연정은 다만 며칠 동안의 뜨거운 만남으로 종언을 고하고 맙니다. 1958년 바흐만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극작가 막스 프리쉬를 사귀게 됩니다. 프리쉬는 바흐만보다 15살이나 많은 문학의 대선배였습니다. 그미는 아예 짐을 챙겨서 취히리에 있는 프리쉬의 집으로 입주해버립니다.

 

 

 Das PLAGIAT - Kufstein

 

 

 

문학의 영역에서 표절이란 참으로 많은 문제를 드러내게 한다. 문장 하나 베끼면 표절로 간주된다. 학생들은 리포트를 쓸 때 남의 것을 베껴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신적 도둑질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사실을 베껴쓰는 것은 표절이 아니다. 남의 주장을 가로채는 것이 바로 표절이다. 알면서 베끼는 경우가 있고, 모르면서 베끼는 경우가 있다. 비문학 텍스트의 경우: 가령 논문을 쓸 때 인용을 해주면 된다. 문학 텍스트의 경우: 각주를 처리할 수 없으므로 애매하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그리고 브레히트의 작품은 모조리 표절인가? 그렇지 않다. 맨 처음 모토 (Motto)에 언급하면 된다.

 

그런데 첼란은 심각한 구설수에 오르게 됩니다. 첼란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은 이반 골 Yvan Goll의 아내, 클레어 골이 제기한 표절 시비였습니다. 그미의 말에 의하면 첼란은 이반 골의 시를 표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서독의 독자들이 첼란에 대해 호의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1959년 베를린의 신문 타게스슈피겔 Tagesspiegel”에는 첼란을 음해하는 글들이 실리게 됩니다. 가령 첼란의 시집 언어의 창살이 본격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첼란은 동료 시인들로부터 도움을 바랐습니다. 어쩌면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흐만은 수년에 걸쳐 첼란을 두둔하였습니다. 바흐만은 어떻게 해서든 첼란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프리쉬는 이를 방해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묘하게도 연적에 대한 질투심이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프리쉬는 첼란을 돕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바흐만은 첼란을 도와달라고 프리쉬 외에도 많은 동료 작가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오히려 첼란과 바흐만의 명성에 흠집을 가하게 됩니다. 첼란 문제로 인하여 바흐만은 196112월에 끝내 막스 프리쉬와 이별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후로 불행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 편지를 교환합니다.

 

 

 

 

 

체르노비츠의 번화가 모습. 이곳은 시인 첼란이 젊은 시절에 살던 지역이었다. 오늘날 루마니아에 속해 있다.

 

두 사람은 각자 고독하게 생활합니다. 그들의 연결 통로는 문학 현장밖에 없었습니다. 바흐만은 첼란을 계속 도와주려고 했지만, 첼란은 서서히 절필하게 됩니다. 70년대 초에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적인 성공을 거두지만, 첼란은 독일 문단의 교활한 계산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경향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형국에 처하게 됩니다. 첼란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러했듯이 더 이상 그미와 접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흐만으로서 첼란과 절교한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편지를 썼지만, 그것을 모조리 송부하지는 않습니다. 행여나 자신의 속내를 전하여 첼란이 행여나 잘못 이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편지로써 자신들의 속내를 주고받습니다. 첼란은 바흐만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가급적이면 미국으로 여행하지 말라, 고고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천박한 문화 운동의 기수로 활약하지 말라 등이 바로 그러한 충고였습니다. 다른 한편 바흐만은 첼란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주위의 음해하는 자들에 대해 당당하게 처신하라. 표절 시비에 초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호 조언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나치의 문장 (紋章), 스와스티카는 그 자체 변태 성욕을 상징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서광이었다. 라마 불교 내지 비의적 종교 서적을 마스터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치  영역에서 실천하려고 하였다. 가령 SS 대원들의 변태적 행위는 히틀러의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의 만 (卍)을 반대로 표현한 것은 변태적 욕구를 상징하고 있다. 모든 질서는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계 방향 반대로 흐르는데, 나치는 이를 거역하려고 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운을 정반대로 돌리려고 시도하는 것 - 그것이 히틀러의 의향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 사이는 서서히 멀어집니다. 60년대에 이르러 독일 사람들은 과거의 나치 정부와 그들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과거에 매달린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엇습니다. 47 그룹의 모임에서 첼란은 죽음의 푸가를 낭독했습니다. 리히터, , 안더쉬 등은 이에 대해 깊이 호응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첼란의 시를 시대착오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6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더 이상 나치 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당면한 사안, 이를 테면 군비 증강의 문제, 핵 문제 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터 옌스의 회고에 의하면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첼란은 마치 괴벨스의 음성으로 피의 푸가를 낭독하고 있네.” 이에 비하면 바흐만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적 대상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호의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주려는 교사로서의 자세를 견지하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더욱더 새로운 소재, 더 나은 무엇을 찾아서 노력하는 작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흐만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팔라초 자케티 호텔. 바흐만은 자신이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여기고, 이탈리아의 이곳에서 오래 거주하였다.

 

첼란은 점점 서독의 독일 독자들로부터 멀어졌지만, 바흐만은 첼란과 독자들 사이를 중개하려는 노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미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바흐만은 자신의 소설 호수로 향하는 세 개의 길 Drei Wege zum See에서 첼란과의 사랑을 그대로 서술하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완성하기 힘든 어려운 사랑의 길,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 등이 은밀하게 그렇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서로 다른 두 남녀가 그들 사이의 불신이라든가 의견 대립 등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는가? 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1970년 첼란은 파리의 센 강에 투신하여 삶을 마감합니다. 그의 서재에는 친구인 바이스글라스의 시집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이스글라스의 시 "그는"에는 "죽음의 푸가"에 실린 구절이 실려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J, 그의 자살은 과거의 끔찍한 고통,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 차별로 인한 심리적 갈등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자살은 바흐만에게는 거대한 사랑의 상실로 가다왔습니다. 거대한 사랑의 상실은 그미에게 고통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바흐만은 그미의 소설 말리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나의 삶도 이제는 끝이야. 그는 통행하는 길을 지나치다 강물에 몸을 던졌어. 그는 나의 목숨과 같았지, 지금까지 내 목숨보다 그를 더 사랑했어.” 여기서 통행하는 선이란 틀림없이 죽음의 수용소를 가리키는 영역일 수 있습니다. 바흐만은 19731017일 로마의 어느 호텔의 방화 사건으로 인하여 4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만일 그미가 술을 마시고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방화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