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 (1)

필자 (匹子) 2018. 10. 9. 10:20

1. 사회 계약과 계몽주의의 유토피아: 친애하는 W, 지금까지 우리는 르네상스의 유토피아의 특성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신, 자연 그리고 전통 등을 맹신하지 않고, 인간의 고유한 이성에 대해 서서히 기대감을 표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 계약과 관련되는 모델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오로지 인간이야 말로 정치적 사회적 세계의 근원이며, 창조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고야 말로 근대의 유토피아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작용합니다. 사회의 계약에 관한 이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관점에서 추구해나가는 기본적 사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 계약의 이론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과연 인간이 그룹을 지어 함께 생활하던 최초의 자연 상태는 어떠했는가? 개별적 인간들은 어떠한 이유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을까? 험난한 자연에서의 삶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개개인들이 협동해야 했는데, 이는 이기심에 기인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본성 속에 도사린 협동심의 발로인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결론 내리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 사회의 공동체가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개별적 인간이 합리적인 생각을 지닌 채 이성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 질서 체계라는 사실입니다.

 

2. 사회 유토피아와 사회 계약론: 토머스 모어, 캄파넬라, 안드레애 등이 서술한 유토피아는 모두 정확한 기하학적 구도에 의해서 축조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는 구체적인 기하학적 구도에 의해서 자신의 사회 계약 이론을 설계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가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생산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윤리라든가 정치 역시 기하학적 모델에 의해서 얼마든지 축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자연을 창조했듯이, 인간은 인위적인 무엇, 즉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를 얼마든지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약으로서의 국가는 신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며, 인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축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자유롭고 평등한 개별 인간들이 공동으로 합의한다는 전제 하에서 지배 구도는 얼마든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게 홉스의 믿음이었습니다. 칸트의 표현을 빌면 국가의 법적 이상은 계약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사회 계약으로써 국가의 이을 정립하고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사회 유토피아와 사회 계약 이론 사이의 공동성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참담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에 걸맞는 유토피아의 설계: 제라드 윈스탠리 (1609 1676)는 영국의 정치가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인간이 만들고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토마스 홉스가 내세운 사회 계약의 이론을 마치 증명해내기라도 하듯이, 자유의 법 The Law of Freedom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의 초기 사회주의자에 해당하는 윈스탠리는 홉스의 견해, 그 이상을 추적하였습니다. 홉스는 레비아탄 Leviathan(1651)에서 자연 상태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 bellum omnium contra omne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갈등은 윈스탠리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의 외부적 상태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위스탠리는 홉스보다도 더 첨예한 견해를 드러낸 셈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영국 국가는 개개인의 관심사 내지 요구사항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한다. 이로 인하여 지구상에는 수많은 전쟁, 학살 그리고 싸움과 갈등이 출현하고 있다.” (Winstanley: 32f).

 

4. 문제는 유토피아의 실천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윈스탠리는 지금까지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처음으로 추진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문헌학적으로 서술한 새로운 사상을 과감하게 실제 현실에 혁명적으로 적용하는 과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설계한 이상적 사회 구도를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실천하려고 감히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어떤 급진적 전복을 요구하기는커녕 어떠한 신선한 정책이 실제 현실에 나타나기를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의 시점까지 가상적 공간 속에 설계되었던 변혁의 사고는 그저 머릿속의 추상적 실험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실천에 관한 문제는 윈스탠리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당시에 어떠한 정치적 사건도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윈스탠리의 발언을 통해서 처음으로 새로운 사상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문제를 골몰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5. 윈스탠리의 삶과 당시의 영국의 사회상: 윈스탠리는 런던에서 모직 판매상으로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7세기 중엽에 영국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7년 동안 내전을 치렀는데, 이로 인하여 윈스탠리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하게 됩니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혁명적 퓨리턴주의의 좌파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봉건주의를 급진적으로 타파하고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평등파 Leveller” 내지 채굴 당 Digger”에 가담하였습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이 간행된 시기는 15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를 지니는데, 유럽의 경제적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모어는 그의 책에서 특히 부유한 지주 그리고 고등룸펜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윈스탠리는 영국의 끔찍한 빈부차이를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부유한 대지주들은 그들의 농장에서 양과 가축들을 배불리 먹이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가축들의 먹이를 구할 수 없어서, 소 한 마리조차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거지와 부랑자들은 굶주림 때문에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는데, 추노꾼들은 그들을 처음 체포하게 되면, 그들의 팔에다 문신을 새깁니다. 두 번째 체포될 경우 거지와 부랑자들은 교회의 축복 없이 즉시에 처형당합니다. (Berneri: 47). 유럽 경찰의 전신은 바로 이러한 추노꾼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없어서 숙식을 마련할 길이 없는 거지와 부랑자를 체포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경찰 신분으로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블로흐: 418).

 

6. 영국의 내란과 윈스탠리의 공동체의 실험: “평등파 Leveller” 그리고 채굴 당 Digger”의 좌측 파 사람들은 1648년에 함께 뭉쳐서 급진적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 개혁을 위하여 어떤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고 과감하게 제안했을 뿐 아니라, 어떤 놀라운 사항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유재산제도의 철폐 그리고 화폐의 폐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어지고, 화폐가 철폐되어야만 진정한 혁명이 실현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윈스탠리는 수많은 팸플릿을 작성하고, 올리버 크롬웰에게 보내는 글 자유의 법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차제에 지속적으로 진정한 평등파의 프로그램으로 활용됩니다. 윈스탠리가 속해 있던 평등파사람들은 농민들을 위한 땅을 되찾기 위하여 정치적 데모와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찰스 1세가 의회파의 크롬웰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하던 1649년에 윈스탠리는 윌리엄 에버라드 William Everard 등과 같은 동지들과 함께 성 조지 힐 근처에서 공동체를 영위하며 농사지으려고 계획합니다. 이는 평등 파내지는 채굴당의 농업 공동체였습니다. 농업 공동체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에 필요한 사항만을 인근 대지주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로써 나중에 대지주 한 명은 스스로 자신의 땅을 포기하고, 공동체에게 모든 권리를 이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농업 공동체는 순탄하게 영위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국 시청은 채굴 당의 정치적 활동을 허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중앙 정부는 전국의 대지주와 합세하여 윈스탠리가 속해 있던 노동자와 농부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어느 날 경찰은 그들의 마차와 농기구를 모조리 파괴하고, 거주지를 몰수하였으며, 농부들의 수확물을 불태워버렸습니다. 1650년 결국 농부들 가운데 주동자 모두가 체포되자, “평등파내지 채굴 당사람들이 추구하던 공동체의 삶이라는 실험은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7. 윈스탠리가 설계한 유토피아의 세 가지 특성: 공동체의 삶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윈스탠리는 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지인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방대한 문헌을 집필하여 발표합니다. 이것이 바로 윈스탠리의 저작물 자유의 법입니다. 이것은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에게 보내기 위해서 집필된 것인데, 여기에는 하나의 대안 사회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의 영국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윈스탠리의 유토피아는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저자가 문학적 가상이라는 매개체를 포기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저자가 자신의 사회 설계를 주어진 사회에 실제로 적용시키려는 의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사고가 어떤 종말론적인 기대감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문학 유토피아는 하나의 가상적 현실을 토대로 설계되었는데, 윈스탠리는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멀리 떨어진 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현실과 무관한 공간도 아니라, 저자가 살고 있는 17세기의 영국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윈스탠리의 작품은 유희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실험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자는 말하자면 즐겁고 유희적인 표현으로 모든 것을 교육학적으로 서술하려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윈스탠리가 주어진 현실을 무력으로 전복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생전에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회가 변화되기를 갈구하였습니다.

 

8. 종말론적 구원과 유토피아의 설계: 윈스탠리가 고찰하는 바람직한 현실상 속에는 어떤 종말론적인 구원의 전략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49년에 그는 정의의 새로운 법이라는 문헌에서 정의로움이 자리하고 있는 새로운 천국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종말론에 의하면 구원은 신의 작품으로 간주됩니다. “주께서는 신속하게 행동할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한 시간 내에 몰락하고, 이스라엘은 한 시간 내에 형성될 것이다. (...) 전지전능한 분의 힘만이 지상의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물론 나중에 이르러서 윈스탠리는 이러한 종말론의 자세로부터 약간 거리감을 취합니다. 자유의 법에서 윈스탠리는 사회적 질서를 엄밀하게 설계하고 있는데, 이러한 질서는 오로지 인간의 변화 의지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신앙의 믿음보다는 이성의 인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윈스탠리는 종교적 신비주의에서 합리적인 무신론으로 입장을 바꾸었으며, 농업 개혁의 운동으로부터 완전한 공동체주의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게 됩니다. (Saage: 73) 작품은 세계가 어떤 구체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재 축조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윈스탠리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하나의 가상적인 모델에서 삶의 여러 영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종교, 가정, 교육, 학문, 정치 그리고 경제 등이 바로 그 영역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