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에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
친애하는 J, 알브레히트 뒤러 (1471 - 1528)의 그림에 대해 커다란 애착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그림들은 신에 대한 깊은 신앙심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유학의 기간 동안 뉘른베르크에 있는 뒤러하우스를 몇 번 찾아 갔습니다. 뒤러는 평생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가난과 폭정 그리고 종교개혁이 난무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예컨대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신대륙이 발견되었으며, 46세가 되던 해에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고, 54세의 나이에는 독일에서 뮌처에 의해서 농민 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뒤러는 자신의 개혁적 지조 그리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평생에 걸쳐 남긴 작품은 유화 100여점, 목판화 350여점, 동판화 100여점 그리고 소묘 900점입니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뒤러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작품은 아무래도 1514년에 제작된 「멜랑콜리아 I」일 것입니다. 혹자는 가로 60센티 세로 70센티에 해당하는 이 동판화를 소품으로 간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사, 죽음 악마」 그리고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뒤러가 남긴 세 편의 탁월한 명작 가운데 한 작품이지요. 그것은 두 편과 함께 가장 난해하고 가장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 숨어있는 함의는 오늘날까지도 낱낱이 밝혀지지 않고 있을 정도입니다.
친애하는 J, 함께 그림을 바라보기로 합시다. 한복판에는 날개를 달고 있는 여인이 팔을 괴고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미는 “멜랑콜리아” (우울)입니다. 그렇다면 그미가 과연 천사일까요? 천사라면, 대체로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왜 여성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미의 곁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즐비하지만, 일단 주인공을 세심하게 관찰해보기로 합시다. 그미의 눈길은 약간 상부로 향해 있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사물을 응시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세계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제한된 (?) 능력을 성찰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손에는 콤파스가 쥐어져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미의 표정에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등장인물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 G. 피코 델라 미란돌라 G. Pico della Mirandola의 작품, 「지상의 천사 Angelo terrestre」(1486)에 나타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명상하는 천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를테면 지상의 천사는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관망할 수 있다고 하는 야곱의 사다리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제 28장 12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의 여섯 번째 계단에 앉아 있습니다. 작품의 상부에는 사다리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상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고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멜랑콜리아와 탑 사이에는 아기 천사가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날개는 절반 정도 꺾여 있으며, 두 손에는 T자 형의 필기도구 그리고 석판을 쥐고 있는 듯합니다. 자세히 바라보세요. 아기천사가 무엇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는 천상과 지상 사이에서 무언가를 그리는데,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마치 석판 가루처럼 연마되어 떨어집니다. 그것은 어쩌면 일촌광음의 파편, 순간이라는 수많은 시간의 파편일지 모릅니다.
바닥에는 개 한마리가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작품에는 다면체와 원구 사이의 좁은 공간에 누워 있지만, 개는 완전히 잠들지 않았습니다. 눈빛이 몽롱한 것으로 미루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알브레히트는 개를 신에 대한 충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동물로 이해하였습니다. 가령 신의 충성스러운 개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인 “Domini canes”에서 도미니크 수도원의 이름이 파생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 개는 작가가 강조하려는 우울의 정조와 묘하게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천사 주위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늘려져 있습니다. 망치, 펜치, 십자형 바늘, 톱, 대패 등이 이리저리 늘려져 있습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예술가 내지 수공업자들의 도구입니다. 추측컨대 천사는 “기하학의 방식으로 more geometrico” 모든 것을 실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은 처마 방을 꾸밀 때 사용하는 실 저울, 풀무 끄트머리, 금속을 용해하기 위한 숯, 도가니 등이고, 그 왼쪽에는 보석이 보입니다.
“멜랑콜리아” 앞에는 원구와 다면체 그리고 주사위 등이 널려 있습니다. 목수, 석공, 연금술사, 수공업자 등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신의 의도에 따라 정성스럽게 작업하던 장인들의 물건입니다. 가령 마태오의 복음서 제 22장 42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하는 일은 원래 신의 뜻이니 그저 놀랍게 보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작품의 주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련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멜랑콜리아와 아기천사 뒤에는 교회 벽이 보입니다. 거기에는 천칭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친애하는 J, 천칭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우울의 근본적 이유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일까요? 모래시계와 해시계는 통상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삶과 인간 삶의 일회성을 암시해줍니다. 종 (鐘)은 어떤 마지막 시간 혹은 죽음의 시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교회의 벽에 붙은 마법의 사각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숫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6 | 3 | 2 | 13 |
5 | 10 | 11 | 8 |
9 | 6 | 7 | 12 |
4 | 15 | 14 | 1 |
맨 아래의 두 숫자인 15, 14는 작품 완성의 연도를 말해줍니다. 기이한 것은 가로의 합, 세로의 합이 모두 34라는 것입니다. 경사진 수의 합도 34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서리의 합 16 + 13 + 4 + 1도 34이며, 내부의 합 10 + 11 + 6 + 7 역시 34입니다. 중간에 있는 가장자리의 수를 더해도 34입니다. (5 + 8 + 9 + 12 = 34, 3 + 2 + 15 + 14 = 34). 어때요 놀랍지 않습니까?
친애하는 J, 작품의 배경은 어떠한가요? 하늘은 어떤 혜성 (혹은 태양?)에 의해서 서서히 밝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게 하는 것은 혜성 혹은 태양의 빛 그리고 건물 벽의 그림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작품의 주제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천상의 운행과정이 지상의 운행 과정과 정반대되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의 제반 양태 그리고 이성적인 논리는 더 이상 신의 섭리 그리고 신의 권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은 지금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과업을 거룩한 신을 위해서 그리고 지고의 신을 위해서 행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멜랑콜리아는 인간의 모든 삶이 이제는 더 이상 신에 의해서 예정된 길로 향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유독 그미에게 처절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세상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애타게 갈구해온 신의 축복 내지 “발현 Epiphania”에 대한 기대감을 차마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J, 또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작품은 인간의 창의성에 관한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여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제 2의 신, 다시 말해서 “또 다른 신 Deus alter“으로 파악될 수 있지요. 이는 스칼리게르 (Scaliger)에 의해서 예술론으로 제기된 사항입니다. 중세의 질서가 무너질 때 인간은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등장인물은 천국이 어쩌면 하나의 허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신의 권능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역시 바로 이 점을 말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과거에 믿던 모든 미망 迷妄은 사라졌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과거에 신이 행하던 놀라운 힘을 행할 수 없다. 그러니 남아 있는 것은 혼돈이란 말인가? 이렇게 허망할 수 있는가?” 그래, 뒤러는 깨달음과 각성으로서의 우울 내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동반하는 우울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게 틀림없습니다. “주께서는 결코 흥분하지 않으리라 (Non in commotione Dominus.)”라고 중얼거리면서.
뭉크의 그림 멜랑콜리아
고트프리트 켈러 Gottfried Keller는 뒤러릐 동판화를 한 편의 시에서 다루었습니다. 그의 작품 「우울 Melancholie」 마지막 연에서 천사의 형체는 낭만주의의 의미에서 “예술적 판타지의 구현”으로 표현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는 1938년에 완성된 자신의 소설의 제목으로서 “우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편집자는 나중에 “구토 La nausée”로 수정하였습니다. 토마스만 Thomas Mann 도 뒤러의 동판화를 작품 속에 반영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에서 음악가인 아드리안 레버퀸의 서재에는 뒤러의 동판화가 걸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토마스만은 음악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엄격한 비종교적 정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귄터 그라스도 뒤러의 작품을 작품 속에 반영했습니다. 그의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에서 Aus dem Tagebuch einer Schnecke』에 등장하는 인물인 어느 교사는 국가사회주의로부터 도피하면서, 자신에게 파시즘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해준 것이 바로 뒤러의 동판화라고 술회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만 첨가하기로 합니다. 소련과 동독이 몰락했을 때 브레멘 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엠머리히 Emmerich 교수는 뒤러의 작품을 언급하였습니다. 멜랑콜리아는 엠머리히에 의하면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 목표와 꿈의 상실로 인해 좌파 지식인들이 느끼는 정조”라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뒤러의 동판화는 반유토피아의 슬픔과 우울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의 정조가 과연 절망과 체념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막무가내로 해석되어도 좋을까요? 구질서의 전복은 처음에는 혼돈과 무질서의 상황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질서의 전복은 또 다른 새로운 사회를 낳을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는 없을까요? 그래, 우울의 정조 속에 분명히 비해 그리고 참혹함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창의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새로운 전환기로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뒤러가 1515년에 만든 코뿔소의 동판화. 그는 이 신비로운 동물을 "Rhinocerus"라고 명명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은 신비로운 동물을 인도에서 데리고 와서 리스본 항구에 내리게 했는데, 이는 분명히 인도 산 탱크코뿔소에 틀림없었다. 뒤러는 이 동물을 보지 못했다. 어느 예술가는 이 짐승을 스케치했는데,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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