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박미소의 시(조) "꽃지 노을"

필자 (匹子) 2021. 12. 19. 06:36

한때, 나도

저처럼 붉은 적이 있었지

 

한 사람 아득함을 끝끝내 담지 못해

뜨겁게, 발설해버린

그런 사랑 있었지

 

세상의 외로움이 견딜 수 없는 날에

혼자 급히 찾아와 반성하듯

서성이며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지운다

 

박미소 시조집: 푸른 고서를 읽다, 들꽃 세상 2020, 67쪽.

 

 

 

박미소 시인의 시집 "푸른 고서를 읽다"를 접했습니다. 명시들이 많이 숨어 있네요. (나중에 명시들을 차례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꽃지 노을"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언어를 아끼고 시적 정서를 압축할 수 있는 장르가 시조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시집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날 때 수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겸연쩍음으로 비치는 정서이지요. 한 사람이 어느 타자에게서 잠시 엿볼 수 있는 애틋한 마음입니다.사랑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 순간적으로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감정에서 출발하는지 모릅니다. 시인은 안면도 근처의 꽃지라는 동네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봅니다.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떠나간 그분의 "아득"한 모습입니다.

 

눈 먼 세상은 사랑하는 연인들 앞에 수많은 장애물을 드리웁니다. 약속, 철조망, 장벽은 지금 여기에서 기쁨울 누리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방해합니다. 만남은 일순간 이별로 돌변하곤 하지요.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 두 사람은 어째서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 재회의 기약 없이 헤어졌을까요? 붉게 서쪽하들을 물들이는 황혼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외로움이 견딜 수 없는 날에/ 혼자 급히" 찾아오는 것은 저녁노을로 인한 기억입니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지우려 하지만, 꽃지의 노을은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작품은 독자의 마음속에 사랑의 슬픔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냅니다. 이로써 시인은 지극히 단순한 시적 표현으로써 어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억 속의 내밀한 연정 그리고 아쉬움의 파문을 재현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