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1)

필자 (匹子) 2020. 10. 18. 09:58

1.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19세기 후반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공동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공동체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어진 국가로부터 직접적으로 간섭받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는 아나키즘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공동체를 결성한 사람으로서 피사 출신의 아나키스트, 지오반니 로시 (Giovanni Rossi, 1856 – 1943)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로시의 유토피아는 미리 말씀드리건대 19세기 후반의 문학 유토피아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공동체의 본질을 염두에 둔다면, 샤를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와 매우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노동의 향유의 측면에서 그리고 자치, 자활, 자생의 공동체는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시는 특히 자신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범위로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푸리에의 유토피아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밖에 소규모 지방분권적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 로시의 유토피아는 윌리엄 모리스의 먼 미래의 런던과 흡사한 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2. 지오반니 로시 (1): 유토피아주의자들 가운데 윈스탠리를 제외하면, 지오반니 로시만큼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킨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로시는 처음부터 지속 가능한 아나키즘 공동체를 구상하였으며, 이를 수미일관되게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지오반니 로시는 1856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전통적으로 의사로 살아온 집안이었습니다. 로시는 처음에는 의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나, 부모의 뜻과는 반대로, 농업과 수의학에 전념하게 됩니다.

 

뒤이어 농업학교를 다니면서, 수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로시는 자생적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1878년에서 1891년 사이에 그는 “카르디아스”라는 가명으로 「어떤 사회주의 공동체」라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로시는 세실리아라는 여주인공을 등장시켜서, 국가의 권위적인 지배가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로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근엄한 종교, 개개인의 경제적 차별을 공고히 하는 사유재산제도 그리고 성적 차별 내지 부자유를 조장하는 일부일처제의 핵가족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반국가주의의 혐의로 1879년 4월에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3. 지오반니 로시 (2): 1886년부터 로시는 친구인 안드레아 코스타와 함께 「실험 Esperimento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여러 아나키즘 공동체의 수평적 확산 그리고 협동을 도모하기 위한 목표로 간행되었습니다. 로시는 국가 자본주의의 제반 문제를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자생적 자치적 공동체 운동을 채택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공동체 모델을 먼 미래가 아니라, 19세기의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에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구상한 유토피아의 모델은 설령 위험이 있더라도 시민 자본주의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정착되고 확산되어야 한다고 로시는 굳게 믿었습니다. 드디어 로시는 크레모나에 있는 스타지노 롬바르도 Stagno Lombardo에서 새로운 사회적 삶을 실험하기 위한 공동체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드 바르디라는 어느 독자가로부터 땅을 임대받아서,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과 하나의 조합을 운영하였습니다. 땅의 임대 기간은 10년으로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조합의 임원들은 나중에 얼마든지 해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로시는 땅의 점유 문제로 피사 관청 사람들과 법적인 문제로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서 공증인을 대동해서 하나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서에서 그는 공동체의 사용을 10년으로 확정하였으며, 나중에 다시 10년 연기할 수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87년 11월 11일 공동체는 시타델라 Cittadella 협동조합이 생겨나게 되었고, 조합의 경제적 이익은 서서히 높아져갔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에서 시도한 로시의 공동체의 실험은 여전히 여러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공동체 내에서의 자유연애를 표방하는 사랑의 삶의 생활방식이 19세기 이탈리아 시민 사회의 보수성의 장벽에 부딪치곤 하였습니다.

 

4. 지오반니 로시 (3): 신대륙에서 공동체를 결성하려는 로시의 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브라질의 왕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왕 페드로 2세는 1888년 4월에 병에 걸려 치료차 유럽으로 건너오게 되었는데, 밀라노에서 지오반니 로시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로시의 글에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 가능성 뿐 아니라, 자유연애, 사유재산제도의 철폐, 어떠한 계층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평등한 인간관계, 종교적 독단론의 폐지 등의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페드로 2세는 로시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땅 가운데 파라냐 지역에서 농업협동조합을 운영하는 게 어떠한가? 하고 제안하였습니다.

 

로시는 브라질의 파라냐 지역에서 자신이 뜻하던 바를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로시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1890년 2월 20일 리오데 자네이로로 떠납니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는 유럽과는 전혀 딴판이었으며, 특히 이질적인 토양이 문제였습니다. 로시가 의도하던 농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전혀 다른 곡물이 생산되었습니다. 게다가 협동조합의 임원으로 가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러시아 그리고 독일 출신의 식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라 세실리아” 협동조합을 통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경제적 이득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주어져 있었습니다. 조합의 임원들은 약 3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남자들이었습니다. 다수의 남자들과 소수의 여자들 사이에 어떠한 애정적 갈등이 태동했는지 우리는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로시가 시도하려던 자유연애의 실천은 갈등과 투쟁만 부추기게 됩니다. 어쨌든 공동체의 실험은 1894년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완전한 실패를 안겨줍니다. 마치 에티엔 카베 E. Cabet가 그러했듯이, 로시는 미국에서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인정하면서, 쓰라린 마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5. 로시의 공동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로시의 브라질에서의 코뮌 운동뿐이 아니라, 1887년에 시도한 로시의 “포지오 알 마레 Posio al Mare 공동체의 실험일 것입니다. 로시의 공동체는 처음에는 조합원들 사이에 상당히 많은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투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실제로 공동체는 조합원들 사이의 증오심 그리고 경쟁으로 인한 질투심을 완전히 근절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Rossi: 43).게다가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일을 감독하는 기술자의 말에 복종하고, 각 분과위원회의 위원장, 대표자들의 권위를 일단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곤 하였습니다.

 

공동체의 임원들은 서서히 물품을 생산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의견의 일치를 이룩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노동이 시간에 구속되어서는 안 되며, 질적으로 높은 제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는 데 대한 의견일치 말입니다. 문제는 일에 대한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사람들은 노동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면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번갈아서, 다시 말해서 로테이션의 방식으로 한 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룹의 책임자들이 행사했던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 역시 서서히 사라지게 되리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유지되던 이러한 권위주의의 위계질서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사라지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고 로시는 진단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노동을 이끌어나가는 지도자는 지속적으로 대표성을 고수하게 되고,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항구적 엘리트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포지오 알 마레 공동체 내에서 특정 부류가 언제나 억압자로 군림하고, 특정부류가 아무런 변함없이 억압당하다가 반역하는 사람이 되면, 공동체는 평범한 계층적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