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2)

필자 (匹子) 2020. 10. 18. 10:03

6. 로시의 코뮌이 전통적 유토피아에서 수용한 사항들: 로시의 아나키즘 공동체 역시 고전적인 유토피아 패러다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로시는 노동의 향유 내지 즐겁게 일하는 유형의 노동의 가능성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에서 빌려왔습니다. 게다가 당사자가 원할 경우 두 달에 한 번씩 성의 파트너를 교체하는 사랑의 삶의 체제 역시 푸리에의 유토피아에서 이미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나아가 로시는 코뮌을 운영하는 과업에서 필수적으로 첨부되어야 할 조건으로서 과학 기술의 도입 내지 산업의 육성이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시타델라 협동조합 그리고 브라질에서 시도된 라 세실리아 공동체는 과학 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중앙집권적인 유토피아주의자인 생시몽의 사상에서 유래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Saage: 334). 로시는 더럽고, 불결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노동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제도를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벨러미의 유토피아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밖에 인간과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평등 사상의 공식은 이전에 르네상스 시대의 라블레 Rabelais의 유토피아에서 그리고 절대 왕정 시기의 푸아니 Foigny의 유토피아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7. 로시의 유토피아에서 드러난 강압적 특징들: 얼핏 보면, 로시의 공동체는 만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강제적 사항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엄격한 훈련을 가리킵니다. 아무런 뒷배경이 없는 노동자로서의 일하지 않고서는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노동에 대한 필연성 그리고 강제성을 내세운 것은 로시 공동체의 딜레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로시는 유토피아적 실험이 성공리에 끝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현실 변화의 에너지에 대해 커다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사회 현실은 소규모의 코뮌 운동을 통해서 더 나은 삶의 환경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모리스 Morris의 유토피아 그리고 데자크 Déjacque의 유토피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줍니다. 모리스와 데자크의 경우 오로지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혁명적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이러한 폭역이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역사적 진보의 동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로시는 비단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전체를 위해서 세계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전체가 8000개의 사회주의 공동체, 수백 개의 자치 도시로 구성되는 꿈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Rossi: 62f).

 

8. 로시의 장편 소설: 로시는 약 20년 후에도 아나키즘에 관한 자신의 이상이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1890년대에 그는 브라질에서 자신의 유토피아 공동체를 실험한 다음에 이를 통한 제반 경험들을 바탕으로 장편 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20세기의 파라나 Der Paranà im XX. Jahrhundert입니다. 주인공, “나”는 사회주의의 지조를 지니고 있는데, 브라질의 시골에 머물면서, 친구의 영지에서 개최되는 저녁 식사에 초대 받게 됩니다.

 

주인은 저녁 식사에 참석한 귀빈들에게 술과 커피 그리고 니코틴을 제공하면서 자신이 심령론자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을 모시며, 영혼과 만나기를 즐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주인공은 주인장이 손님들 뿐 아니라, 여러 유형의 영혼들을 은밀하게 식사에 초대했음을 알아차립니다. 밤이 깊어지자, 대부분의 손님들을 제 집으로 떠나고 주인장과 주인공, 두 사람만이 끝까지 자리에 남게 됩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10년 후에는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리리라는 데 합의합니다.

 

이때 주인공은 홀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태운 자동 의자 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감지합니다. 자동 의자 위에는 그리요 박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요 박사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인간으로서 마치 피와 살로 구성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Rossi: 278).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즉 브라질의 지방인 파라냐가 서서히 사회 문화적으로 세력을 얻게 되어, 남아메리카의 대륙 전체에 그야말로 전위적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는 결론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유럽에 있는 계층 차이에 근거한 정치 시스템은 관료들의 탐욕과 부패로 인하여 서서히 몰락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벨기에에서 여러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토대 하에 하나의 아나키즘 공동체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브라질의 파라냐 지방에 새로운 자극을 가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시대가 개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로시의 소설은 아나키즘에 입각한 사회주의 시스템에 대한 찬란한 희망을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로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파라냐는 소박하고 세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땅이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벨기에 인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가장 정직한 인간적 사고를 실천하게 될 것이다.” (Rossi: 286).

 

9. 로시 공동체의 여러 가지 특징들: 그렇다면 이러한 아나키즘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사회는 과연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요? 처음에는 지오반니 로시는 국가의 권력을 배제한 지방의 코뮌을 구상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포지오 알 마레 공동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기한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는 공동체의 상은 포지오 알 마레 Poggio al Mare 공동체의 모습과는 약간 다릅니다. 첫

 

째로 로시의 새로운 공동체 상에서는 과거에 나타난 이상적 아나키즘에 의해 설립된 코뮌에 비해서 정치적, 사회 경제적 그리고 지리학적인 조건들이 이질적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공동체에서 자연은 이곳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주는 보고와 같으며, 주민의 수만 해도 약 이천 만에 달합니다. 이들 가운데 원주민은 불과 사백 만에 달하고, 총 인구의 5분의 4는 사회주의 지조를 신봉하며 이곳에 유입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로시의 새로운 공동체는 높은 교육 수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술자, 발명가,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로시의 새로운 코뮌은 노동 그리고 인민 경제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효용 가치를 기구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구를 통해서 모든 능력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발휘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기구들은 여러 가지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보편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10. 다른 코뮌과의 협력 작업: 또한 세 번째 놀라운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라나 공동체는 결코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영위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곳 사람들은 아나키즘 사회주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벨기에와 자유로운 인적 물적 자원의 교환에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파라나 공동체 그리고 벨기에에 있는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동체는 상호 학문적 기술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로시는 브라질에서 새로운 코뮌을 결성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방식을 무조건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과거에 포지오 알 마레에서 그는 절대적 평등이라는 공산주의의 원칙을 준수하려고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때로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공동체에서 채택된 슬로건은 “만을 위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만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코뮌인 파라냐에서 채택된 슬로건은 달랐습니다. “일하지 않으려는 자는 어떠한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된다.” (Rossi: 46). 물론 로시는 이러한 슬로건이야 말로 자신의 결정적인 실수라는 것을 추후에 인정하였습니다. 사회주의의 지조를 지닌 자유로운 개인의 의지는 결코 필연적 노동에 관한 의무와 상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개개인에게 때로는 이른바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역시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1. 주어진 현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이상 사이의 갈등: 사람들 가운데에는 열심히 일하는 자가 있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습니다. 또한 노동의 실적을 극대화시키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개개인의 이기심에 달려 있다고 로시는 주장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이야 말로 공산주의의 물질적 평등성에 관한 사상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악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아의 욕구를 공산주의의 평등성이라는 이상과 접목시키는 일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체의 안녕을 도모하자고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누군가 개인주의의 입장으로 이에 대해 항의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눈앞의 삶 때문에 공산주의 내지 평등에 관해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신의 이웃보다도 더 잘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선전은 지금까지 공동체의 사람들이 꿈꾸는 성공 그 이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이러한 선전을 거부하며, 설령 공산주의의 평등에 관한 이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Rossi 271).

 

실제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이 처음에 추구하려던 공산주의의 평등이라는 목표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하리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공산주의의 평등에 대한 확신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물음이 속출하게 됩니다. 즉 왜 우리가 옛날의 질서를 저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