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7)

필자 (匹子) 2020. 9. 4. 15:12

20. 소설 속의 세 가지 전형 (1): 공허함: 에코 소설의 현실은 14세기 이탈리아라는 배경 역시 하나의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현실입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오늘날과 관련될 수도,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가령 연쇄 살인 사건은 지어낸 이야기이며, 소수파의 종교 개혁 운동은 이른바 제반 (혁명) 운동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소설 속의 세 가지 전형을 언급할까 합니다. 이는 아마도 에코의 문학과 포스트모던 (탈 현대성) 사이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특성들입니다. 그것들은 공허함 , 무관성 (無関性) 그리고 수수방관주의로 요약되는데, 이것들은 서로의 견해를 상호 의존적으로 교묘하게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사항은 공허함을 가리킵니다.

 

에코의 소설은 일견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사상을 용납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작품이 얼마든지 다양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은 에코의 “개방된 예술 작품 das offene Kunstwerk”이라는 책에서 피력된 바 있습니다. 에코는 “참다운 독자는 텍스트의 비밀이 그 공허함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공허함 속에는 하나의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용인하는 입장 Anything goes”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금지하려는 저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물에 대한 의심이나 금지 자체가 문제되는 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주어진 사항들에 대한 의심은 필수적이지요.

 

그렇지만 에코의 경우 공허함은 의심 내지는 금지가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무해화 (無害化)시키려는 목표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에코는 일견 반 독단주의를 내세우지만, 대립되는 두개의 가치 철학으로부터 비판적 가시를 뜯어낸 뒤, 이를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21. 소설 속의 세 가지 전형 (2): 무관심: 소설의 두 번째 전형은 무관심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물은 에코의 견해에 의하면 기호나 부호에 의해 설명되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물들은 어떠한 체계나 시스템에 의해서 예정된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역사적 필연은 용인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의 뜻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이성 역시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에코가 배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인과 법칙이요, 변증법이며, 모든 가치 체계의 연관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입니다. 바로 이러한 강화된 우연성 때문에 결국 독자들은 주어진 질서에 대해 찬성하지 반대하지도 못하는, 그러한 묘한 느낌에 휩싸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연 속에는 -아주 적은 량이지만- (불규칙적 요인으로서의) 이유 내지는 동기가 내재하지 않는가요? 그럼에도 에코는 이러한 원인으로서의 역사, 변증법 그리고 가치 체계 등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에코는 탈 역사주의적 가상 속에서 변증법을 해체시키려 했습니다. 이로써 소설 속에서는 사회적 상황 속의 대립 내지 모순이 그저 양립성과 병존 성에 의해 대치되어 있습니다. 무릇 모순 대신에 서로 무관한 (?) 병존만이 도사린 곳에서는 양극은 부딪치지 않는 법입니다. 이로써 그곳에서는 변증법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가치 판단으로 인한 모순 대신에, 구조주의적 덧셈 뺄셈, 그게 아니라면 기껏해야 블랙박스의 출력 (Out-put)과 입력 (In-put)만이 중요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