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3)

필자 (匹子) 2020. 10. 18. 10:08

12. 푸리에 사상의 모순점, 해결책은 없는가?: 설령 로시가 노동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노동에 대한 매력을 부추긴다고 하더라도, 자아의 원래 관심사는 그러 인해서 축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동자 공동체 속에서는 명령자 내지 수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동등한 친구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과 관심에 따라 일에 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잘 아는 사람에게 문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공동체의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향상시키고 노동의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로시는 푸리에의 공동체 운동에서 여러 모티프를 찾아내었습니다. 푸리에에 의하면 어떻게 해서든 노동의 즐거움을 찾아내어 이를 실천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이에 대해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시는 노동의 향유에 관한 사고를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에 관해 설득하고 이해를 촉구시키지 못했음을 분명히 토로합니다. 만약 개인의 관심사가 협동의 정신에 의해서 자극 받지 못하고, 생산에 있어서의 비용 절감 그리고 기계의 도움 등에 의해서 대치될 수 없다면, 공동체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고 로시는 묻습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로시는 믿습니다. 그것은 이기심을 어느 정도 떨친 이타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간형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으로 평등한 삶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로시는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이타주의, 자기중심적 사고의 타파 그리고 협동심”이라고 합니다. (Rossi: 295). 로시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만약 이러한 덕목이 없다면, 지배 없는 사회가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는가? 만약 공동체 내에서 과거의 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의견 대립 내지 반목이 그대로 온존한다면, 과연 어떻게 아나키즘의 공동체 사회가 제대로 가능할 수 있는가?

 

13. 개인의 자발적 참여와 협동적 노동: 로시는 자신의 논의를 개진하면서 급진적인 개인주의로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개개인의 자발적인 사고를 전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누군가 도시를 계획하거나, 거대한 건물을 지으려고 구상한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 등장하여 반드시 자신의 계획을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이 일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만약 어떤 구상이 공개적 토론을 통해서 공동체에 필요하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 공동체 내에서 하나의 조합이 결성됩니다.

 

그 다음에 조합은 제반 개별적 기술의 문제, 노동 기구, 노동 시간 그리고 요구되는 수행 결과 등을 확정하게 됩니다. 모든 사업 내용은 대부분의 경우 조합원들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필요한 노동 수행,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는 문제, 원자재의 선택, 기계 사용을 극대화하는 방안 등은 조합원들의 고유한 판단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항이 국가의 중재 내지는 간섭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항입니다.

 

14. 모두에게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게 하라: 로시의 공동체 사람들은 브라질 국가의 모든 정책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지닌다면, 분권화된 조합들은 외부로부터 특수한 전문가를 유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 사이에 등급이 매겨져서, 전문가 내지 일급과 이급 노동자 등으로 분류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래의 계급 사회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관심에 따라서 자신의 일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로시의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이러한 사회적 차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습니다. “거 참 섬세한 생각이로군요, 사회에는 수많은 계층과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지요, 이는 서인도 제도의 인디언 부족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에 대해 파라냐 공동체에 속하는 어느 남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계층, 계급이라고요? 그렇지만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만인은 어떤 자유로운 상태, 평등한 공산주의의 사회 속에서 처해 있는 게 아닐까요?” (Rossi 297).

 

15. 노동은 강제적 사항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치는 금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강제성이 일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파라냐에서는 많이 일하고 싶지 않는 자 내지 열심히 일할 수 없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주어진 최소한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면, 공동체는 그를 내버려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달콤한 무위 dolce far niente”의 욕망을 지니거나, 자신의 노동에 대해 더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음날에는 이러한 생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간은 푹 쉬게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행하던,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게으름은 스스로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로시는 주장합니다. 그밖에 파라냐 공동체에서는 사치는 더 이상 금지당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사회 내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고, 어떤 특정한 사항에서의 소비 욕구가 증폭되면, 사치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태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사람들은 보석이라든가 거주지와 의복의 치장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고, 양탄자 내지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16. 남녀평등 그리고 여성의 지위: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파라냐 공동체의 여성들의 지위입니다. 더 이상 유럽 자본주의 시민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처럼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남편, 동지 혹은 행운의 기사의 폼에 안긴 채 쾌락의 기계로서 몸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를 사랑의 파트너로 선택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자유이며, 그들의 권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 체제 내에서 그리고 결혼과는 무관하게 남자를 선택할 권한은 오로지 여성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나아가 여성들에게는 의무적 노동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이 더 이상 들판에서 곡식을 가꾸거나, 부엌에서 요리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청소, 세탁 그리고 육아만이 그들이 하루 종일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감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성들은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모든 의무적인 일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고유한 거주지를 지닐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사상과 감정을 가꾸며, 몸을 단정히 하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17. 요약: 로시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의 요소를 지닌 아나키즘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윌리엄 모리의 지방 분권적 유토피아와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유토피아가 미래의 변화된 영국을 상정하여, 과거의 수공업의 경제에 바탕을 둔 삶을 찬양하고 있다면, 로시의 유토피아는 소규모의 자생적 아나키즘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로시의 코뮌이 사변적으로 숙고한 추상적 상이 아니라, 이탈리아 그리고 브라질이라는 실제 현실에서 실험을 거듭하다가 만들어낸 문학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매우 실제 현실에서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는 아나키즘 공동체의 구체적인 상 그리고 문제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로시의 유토피아가 19세기 말에 태동한 문학 유토피아의 여러 가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노동의 향유 내지 유희로서의 노동이 찬양되고 있는데, 이는 푸리에의 유토피아에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2) 과학 기술의 사용을 극대화시켜서 공동체의 부를 창출하게 합니다. 과거 르네상스 유토피아가 주로 근검절약을 모토로 내세우는 데 비하면, 로시의 유토피아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의 사치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시는 무작정 거대한 시스템으로서의 산업적 시스템을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회 내지 국가 전체가 수많은 자생적 코뮌으로 분산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21세기에 나타나는 유럽의 생태 공동체 운동의 확산의 차원에서 매우 유사성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