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로제타 (Rosetta), 마리 (Marie), 마리옹 (Marion), 레나 (Lena), 줄리 (Julie), 루실 (Lucile) 등은 어디에 거주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독립 요새 바깥입니다. 상기한 여성들은 아무런 보호 없이 야전 지역 한복판에 그냥 머물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고 체계도 여성들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즉 어떠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유형만큼 그렇게 비이성적으로 사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여성들의 존재는 난제로부터 발뺌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요. 그들에게는 정상적 교육에 결핍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정당한 욕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사회의 아래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남자의 힘든 정신적 행위를 쳐다봅니다. 레옹세는 측량, 계산 그리고 고안해낸 수 그리고 계획의 시스템을 통하여 그의 요새를 안전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요새는 가장 강인한 추상성의 공식에 의해서 안전을 느끼고, 추상성의 마지막 진리는 마침내 하나의 공식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만약 레옹세가 현실의 충만함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것은 어떤 접촉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로제타는 어떻게 이를 의심할 수 있을까요? 그는 현실의 충만함을 그대로 인지하는 데 무기력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속으로 자기 자신을 가두어 넣습니다. 레옹세는 추호의 동정심 없는 노동의 분화에 의해서 자신의 전인적 인간성을 강탈당합니다. 그는 상처입고 찢겨진 채 오로지 “자기 인식의 지옥 여행” 속으로 들어서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거의 목숨 걸다시피 자기 자신을 전속력으로 충동질합니다. 그렇지만 칸트 (Kant)에 의하면 자기 인식의 과정 없이는 이성이 존재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자신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어떠한 여성도 인식할 수 없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제타는 침묵을 지킵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 고통을 느끼다가, 그녀는 결국 마리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잃습니다. 로제타는 줄리와 마찬가지로 남자를 위해 죽음을 택합니다. 또한 그녀는 루실과 마찬가지로 광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스스로를 희생시킨 셈이지요. 그리하여 레나는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련하고도 버림받은 샘물이란 말인가? 샘물 위에 수그리고 있는 모든 상을 자신의 조용한 토대 속에서 반사시켜주는 근원일까? 이때 여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창녀인 마리옹 (Marion)만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말하자면 뷔히너는 이 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리얼리즘을 충동합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뷔히너의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작가들이 보다 위대한 문체로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를 추종했지만, 진보 자체가 어떤 새로운 신화를 위한 도구를 내면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진보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사랑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진보의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인간 내면 속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공허감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입니다.
나의 확고한 생각에 의하면 뷔히너는 이른 나이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이에 대해 무시무시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즉 새로운 시대가 그 자체 발견한 욕망은 근본에 있어서 어떤 문명 파괴의 욕망과 일치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지만 뷔히너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누는 다음과 같은 역설의 익살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창조란 파괴와 결합되어 있다”라는 역설을 생각해 보십시오.
게다가 그는 “대량 학살 (Megatote)”이라는 단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뷔히너는 자신의 등장 인물 속에다 죽음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집어넣었습니다. 예컨대 비록 살인적인 기술이라 하더라도, 어떤 완전한 해결책은 놀랍게도 “달콤한” 것으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로케트의 몸통에다 여성의 이름을 첨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뷔히너에게 이러한 착상은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옹세는 거울로 만들어진 자신의 방이 너무 좁다고 느끼지만, 오로지 거울을 떨쳐버리지 않기 위하여 모든 것을 치장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뷔히너는 이 점을 조금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레옹세와 막강하고도 부지런한 그의 후예들은 끔찍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아주 거대한 모사 상이 그들에게 더 이상 어떤 거울로 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렇게 느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상이 눈이든, 여성의 육체이든, 어느 극장이든, 재벌 기업이든, 하나의 막강한 기구이든, 하나의 국가이든 간에 말입니다.
오 누군가 한번 자신을 물구나무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만약 누군가 할 수 있다면. 분명히 뷔히너는 다음과 같은 갈망을 인식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인류 문화의 맹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그러한 불가능한 일을 이행하고싶은 갈망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때문에 작가는 등장 인물로 하여금 말할 수 있는 무엇의 가장자리로 향하게 하여, 맹점의 극단적 자리 주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는 단 한번 고함지름으로써 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령 루실 (Lucile)이 남편, 카미유 (Camille)의 죽음을 접하면서 이성을 잃는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외침을 중시하는 연극 이론은 다소 해결될 수 있는 모순들을 비춰주는 극장을 위해서는 아마도 넌센스일 것입니다. 어떠한 연출가라 하더라도 현존재와 일치되는 것을 단순히 무대 위에 올릴 수 없습니다. 분명히 뷔히너는 이러한 문제와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종래의 극작품 구조와 연결시켜, 관객이 스스로 관람한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상할 수 있도록 조처했습니다. 다시 말해 극작가는 자신의 가상적인 상연 방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을 위한 공간을 창조했던 것입니다. 가령 “나의 발은 차라리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어”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문장은 단말마의 외침 이전에 내 쉴 수 있는 유일한 호흡으로서 아무 소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로제타는 눈에 띄지 않은 채 집에 거주합니다. 말없이 현실로부터 일탈되어, 거부당하고, 이리저리 이용당한 뒤에 소리나지 않은 공간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상은 비록 그녀에게 속한 것이지만,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로제타가 머물고 있는 공간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로제타는 그녀 자신이 아닌 무엇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는, 주체를 박탈당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려고 합니다. 자신의 내적 영혼의 말씀을 전하려 하지요. 스스로 오성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인간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해 책임감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남자를 섬기고, 자신의 유산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로제타는 사랑하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레옹세가 즐기는 쾌락은 그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일 뿐입니다. 이 사실은 뼈저린 체험으로 다가옵니다. 로제타는 자신의 불행을 은폐합니다. 그리고는 춤을 춥니다. 이때 그녀는 레옹세의 비난에 가득 찬 푸념을 듣습니다. 잠자고 싶어, 그러나 너는 춤을 추어야 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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