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볼프: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5)

필자 (匹子) 2018. 7. 19. 21:40

이제 자리잡게 된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두려움이자 레옹세의 두려움이기도 하지요. 이제 그들은 끔찍한 두려움, 터부들 가운데 하나의 터부를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수많은 이름을 지닌 레옹세가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점, 그가 오로지 죽은 자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끔찍한 두려움이지요. 레옹세는 말합니다. 아름다운 시신이여, 그대는 밤 ()의 시커먼 구의 (棺布) 위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누워 있구나. 그 때문에 자연은 생명을 증오하고 죽음을 사랑하는구나.

 

수많은 이름을 지닌 로제타에게는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지 않습니까? 즉 강압에 의해서 죽은 방으로 들어가던가, 아니면 자청해서 죽은 방이 되어야 하는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걸음을 재촉하지만, 그녀의 모든 발걸음은 레옹세를 더욱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의 마음속에 더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혹시 그녀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이성의 요새로부터 벗어나서 진리라는 대포로 공격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레옹세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며, 그를 완전히 분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해야 할까요?

 

두 사람은 상호, 공동적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요? 동일한 패러독스를 통해서 어떤 유일한 묘책을 찾아내어, 서로를 향해 마주보면서, 올바르게 걸어갈 수 없을까요? 레옹세와 로제타의 만남이라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은 정말로 실패로 돌아갈까요?

 

서서히 탭댄스의 오래된 박자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특히 밤에는 박자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립니다. 나의 발은 차라리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의식의 문지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갈등과 냉전의 분위기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경고하며, 미래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해결책을 끊임없이 찾게 합니다. 바로 그러한 의식의 문지방에서는 어떤 생동하는 판타지가 출현합니다. 이러한 판타지는 필연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남성, 여성 작가들의 양심적 고통에 의해서 영양 공급을 받은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토대는 너무나 얇고. 박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서 글쓰는 행위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더 이상 희망에 관한 게 아니라, 오로지 위급한 전시 상태에 관해서 글쓰는 행위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잉게보르크 바흐만 (Ingeborg Bachmann)의 마지막 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의 편도나무

꽃으로써 어떤 은유를

치장해야 할까?

......

내가 어떤 생각을

포획하여, 찬란히 비치는

문장의 독방 속으로 보내야 할까?

첫 번째 좋음을 담은 한 입의 단어로

눈과 귀를 급식시켜야 할까?

 

바흐만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그렇게 해야지. 다른 사람들 또한.)

나의 부분, 결국 상실되어야 할거야.

 

바흐만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믿음 저편의 언어입니다. 불신의 언어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어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의 은유로써 많은 은유들로 하여금 은유의 기능을 포기하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시 구절 속에는 첫 번째 좋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러한 구절은 첫 번째 좋음의 한 입 단어 뭉치와 끝내 결별을 선언합니다. 한마디로 바흐만의 시는 예술을 포기하려는 시인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이 근본적으로 예술을 포기하려는 데도 불구하고, 시인이 쓴 시구는 역설적으로 예술 작품입니다.

 

모든, 이 시대에 생산된 모든 작품들은 내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적인 싹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자기 파괴성은 최소한 예술적 생산을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술은 예술로서, 문학은 문학으로서 결코 스스로를 파기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예술 내지 문학 작품은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해방 내지 일탈의 욕구 자체가 예술 작품 속에 증인으로 남을 테니까요. 바흐만의 주장과는 반대로 예술 작품의 부분결코 상실되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분서갱유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책 속의 가르침은 인간의 사상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절망하고, 자신에 대해 싫증을 내는 문학 작품은 반드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설령 작가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에 대해 구역질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령 작가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직업을 바꾸거나, 어떤 다름 이름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고, 병들거나, 광증에 사로잡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것은 그야말로 침묵에 대한 은유입니다. 예컨대 작가가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침묵을 원하는 경우, 침묵해야 하는 경우, 마침내 침묵해도 좋은 경우 등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렇지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하나의 오랜 침묵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침묵의 색깔은 -단어에도 색깔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무척 암담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뷔히너는 생전에 육체와 정신을 최고도로 긴장시켜, 세 가지의 언어, 즉 정치, 학문 그리고 문학 등의 언어를 결합시켰습니다. 정치적 내용, 학문적 내용 그리고 문학적 내용은 그의 글 속에 함께 용해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러한 세 가지 언어는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일탈되어, 제각기 먼 곳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문학의 언어는 기이하게도 현대인의 현실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 같습니다. 설령 통계, 숫자 도해, 규격 목록 그리고 성과 도표 등이 인간의 현실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가장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오직 문학의 언어입니다. 아마도 자기 인식을 위한 작가의 도덕적 용기가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모릅니다. 아마도 문학 속에는 어떤 다음과 같은 일치되는 내용이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모릅니다. 즉 대부분의 작가가 수세기에 걸쳐 주위로부터 위협 당하고, 상처 입으며 힘든 과정을 거쳐, 우리가 교양내지 예의라고 명명하는 직물을 처절하게 직조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교양 내지 예의 등과 같은 단어에 대해서 낯설음을 느낍니다. 이러한 느낌은 예의내지 교양등이 지향하는 바를 고수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물음을 의식하게 해줍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어는 정치 그리고 학문 등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과는 달리 어떤 아우라 내지 이상적 공간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이 순간 나의 뇌리에 우연히 떠오르는 단어들, 예컨대 평화”, “”, “도시”, “들판”, “”, “죽음등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파멸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까요? 이러한 단어들 대신에 우리가 핵의 대치 상태”, “위성”, “거대 신개발 주택지”, “녹지 공간”, “질료의 운동 형태그리고 최후등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해야 할까요?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의 발명품을 명명할 때 무엇보다도 어떤 특수한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고유한 감정들을 안전한 곳에다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학문적 언어의 구성은 일견 논리적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가들의 다음과 같은 고착된 이념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즉 정치가들은 인류는 여러 차례의 인류 파멸의 가능성을 통하여 구원될 수 있다고 발언하지 않습니까?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