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볼프: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2)

필자 (匹子) 2018. 7. 19. 21:36

문학은 앞으로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남용될까요?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냥 멀거니 이를 지켜보아야 할까요? 무슨 일이 계속 발생하여, 결국 우리의 언어마저 완전히 차단시키게 될까요? 문학은 얼마나 오랫동안 장례식의 초청인으로 작용해야 할까요? 문학은 어떠한 끔찍한 일에 뒤엉켜, 어떠한 죽음 속으로 향해서 사람들의 뒤를 추종하게 될까요? 문학은 더 이상 삶의 조력자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기껏해야 사람들이 편안하게 죽도록 도와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우리가 과거 역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고, 거의 아무런 대안도 없는 현재 속으로 추방당해 있으며, 완전히 사악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를 말해야 할까요?

 

여러 역사적 모순 사항들은 새로운 순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핵무기의 과잉 보유 상태라는 징후 속에서 점차적으로 서서히 발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서양인의 사고 그리고 서양인의 태도를 언어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문학을 생각해 보세요. 문학의 다음과 같은 구조를 생각해 봅시다. 문학적 구조는 여러 가지 모순들을 밝히는 작업을 통해서 스스로 발전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어떤 생산적인 관계를 신뢰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계는 더 이상 안전하다고 간주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학이 제 아무리 달리 곡해되고, 전복되며, 스스로 고통 당하고, 고달픔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작가가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외의 과정 그리고 현실로부터 일탈되는 과정 속에서 공범 (共犯)이어야 하고, 과연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요? 문학이 과연 산업 사회의 거칠기 이를 데 없는 현혹의 책략, 혹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짓된 술수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까요? 기술적으로 모든 게 재생산 가능하게 된 시대에 언어 역시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인 작가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심지어 작가에 관해 거론하게 하는 시대는 어쩌면 플라스틱, 콘크리트 그리고 철강 등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기괴하고, 암울하며 자기 파괴적인 특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종류의 사물들은 인간의 언어로써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양으로 출현했습니다. 따라서 과연 문학의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글쓰기를 그만두게 할까요?

 

괴테 (Goethe)인간은 얼마나 고귀한가!”하고 말했고, 뷔히너는 우리가 창조된 바처럼, 그렇게 어떤 실수가 저질러졌다.”고 말했습니다. 괴테와 뷔히너의 문장 사이에는 50년이라는 시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뷔히너는 도래할 시대의 부호가 그야말로 패러독스임을 예리하게 직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뷔히너를 외면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의 시대는 산업 발전의 시대의 오점을 실제로 수용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위대한 작가가 일찍이 마주친 것은 작가로서의 견해라든가 확신 등이 완전히 백안시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관해서 오늘날의 작가인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데 대해 거의 구역질을 느낄 정도입니다. 우리가 의존한다고 믿는 수많은 단어들, 예컨대 자유”, “평등”, “동포애”, “인간성그리고 정의등은 원래의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일탈되어, 저널리즘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은 상기한 단어들은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어떠한 믿음도 주지 못할 정도입니다. 나아가 이와 반대되는 단어들의 의미 역시 언어의 논리에 따라 박탈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시무시한”, “구원 없는”, “전율을 일으키는”, “위협을 가하는”, “야만적인등은 주어진 우리의 현실적 상황을 정확히 지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익히 잘 알고 있거나, 아는 체 하는, 무언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하여 의기양양해 하는 혹은 체념하는 자세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상기한 단어들 대신에 우리에게 사실로 수용되는 것은 오로지 전도되어 있다라는 단순하고도 조용한 단어일 것입니다.

 

세계의 상태가 전도되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가정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얼마든지 고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은 거대한 말씀의 외침으로부터 마구 찢겨진 우리의 청각을 약간 휴식하게 해줄지 모릅니다. 또한 그것은 수많은 잘못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에 의해서 방해 당하고 있는 우리의 양심에 부담을 덜 주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의 귀에 들리지만, 아직도 우리의 혀 위에 도사리지 않고 있는, 어떤 다른, 적절하고 타당한 언어의 진지한 단어가 과연 존재할까요? 물론 명명하는 행위가 결코 재정립, 회복 그리고 변모 등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떠한 순간에도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어쩌면 전도되었다라는 단어에서 어떤 다른, 적절한 단어들의 연결고리들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즉 과거의 가치를 부정할 뿐 아니라, 어떤 다른, 시대에 적절한 가치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연결고리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조금도 수치심을 느낄 필요 없이 서로 다시금 무언가 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를 탐색하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자존심 그리고 자신의 자의식이 거의 완전할 정도로 사라지는 경우를 견디고 참아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고, 서술하며, 생각하고, 창작하는 언어의 모든 틀 내지는 범례는 이 경우 더 이상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게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 지를 분명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평정과 자제력을 상실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결코 일등이 아닙니다. 여러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파괴되어 돌출해 나오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 기개, 희망 그리고 직접성으로서 인간의 언어 능력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공허한 시대의 공간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은 바로 두려움의 느낌, 바로 그것입니다. 문학 작품에 나타난 선구적 인물들은 언제나 어떤 공포 내지 두려움을 미리 느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포는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들이닥치지 않습니까?

 

춤추어 봐, 로제타, 춤추어, 시대는 너의 우아한 발의 박자에 맞추어 움직여 가도록.

나의 발은 차라리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그것은 잠 속으로 그리고 꿈속으로 향해서 두드리는 하나의 리듬입니다. 누군가를 하나의 의식으로 못 박아버리고 정신없이 신들리게 만드는 리듬. 나의 발은 차라리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춤추어봐 로제타.

로제타는 춤추기 시작합니다. 노래하라, 아 사랑하는 비탄이여, 레옹세는 이제 단 한 번 그녀 대신에, 다만 사랑의 시체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 눈물을 흘리는가, 로제타? - 내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다이아몬드일지 모른다. 레옹세는 혼자서 다음과 같이 독백을 터뜨립니다. 사랑을 얻으려고 애쓰는 어떤 기이한 존재 - 그건 나 자신이 아닌가? 다른 한편 그의 형제인 당통은 옆 무대에서 다음과 같이 공언합니다. 이제 나는 이성의 독립 요새로 퇴진하려고 하오. 그리하여 진리의 대포로 공격하여 앞의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고 나의 적들을 콩가루로 만들어버리겠소.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