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볼프: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1)

필자 (匹子) 2018. 7. 19. 21:34

다름슈타트 독일 아카데미의 언어 문학 분과가 올해에 나에게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뷔히너 문학상의 수상을 계기로 내 마음속에서는 나의 작업이 얼마나 불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극도로 솟구치고 있습니다. 비록 작가라는 업종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작가의 존재 형태에 대한 의혹이 자꾸 솟아오르니까요. 한가하게, 어쩌면 우쭐한 마음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지속적 테마에 관한 논의를 도외시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오늘 이 자리에서 연설하기 어려운 사항을 성찰하고 있는 나의 연설문을 일단 고려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게오르크 뷔히너의 범례는 명백합니다. 글쓰기 그리고 삶이라든가 책임 그리고 과실 등이 내면 속에 서로 엉켜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든 적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책임이나 과실은 작가로 하여금 글쓰며 살고, 살면서 글쓰게 하지만, 아울러 동일한 작업 행위 속에서 작가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작가는 책임감 내지 과실 등을 견뎌낼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무런 책임 없이 죄짓지 않는 것 - 그것은 힘없는 사람들이 당대에 떠올린 갈망의 상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도피의 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글을 쓰는 구체적 현실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관여하면서,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금 무언가를 열망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집요하게 동경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현실 상황 속에서 아무런 책임도 없고 죄도 없는 어떤 상태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항상 오늘 그리고 여기가 존재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의 얼굴에서 가면이 벗겨집니다. 이때 얼굴들도 함께 떠나는 것일까?

 

 

뷔히너를 다시 읽는 것은 자신의 상황을 보다 첨예하게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눈은 피를 보는 데 익숙해 있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단두대의 서슬 푸른 칼날이 아니야. 역사를 지나치는 독일인들의 걸음은 어떤 힘든, 자주 연기되거나, 때로는 질질 끌 정도로 느릿느릿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폭력을 동반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친 걸음걸이였습니다. 독일인들의 이러한 걸음은 독일 작가들로 하여금 언어로써 역사의 도로를 포장하고, 치장하게 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뷔히너의 몇몇 문장에 관해서 강연하려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어느 작가가 쓴 것처럼 울려 퍼지는 그러한 문장 말입니다. 그렇지만 뷔히너의 시대에 해결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뷔히너가 살아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공개적으로 감사함을 표명하는 자리에서 아마 어떤 난처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연 어떠한 권한으로 아주 젊은 남자의 작품 그리고 그의 출현을 한 사람의 증인으로 끌어낼 수 있단 말입니까? 혁명가, 작가, 과학자인 뷔히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시대의 암담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과감하게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내면 속에 담긴 어떤 끔찍한 고통이 극작품 속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냉정함의 대화들 그리고 어떤 예견을 충동하는 산문 작품을 쓰도록 작용한 게 분명하지 않을까요? 고통은 그의 의식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그는 신속하게 서술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문대 위의 형벌과 같다.

 

광기의 고통으로부터 출현하는 의식은 더 이상 작가 스스로 체념해야 하는 과거의 고문당하는 언어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작가에게 정말로 낯선 것입니다. 자신이 보편적인 이성과 더 이상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했을 때, 렌츠 (Lenz)는 그만 미쳐버리고 맙니다. 흐릿한 꿈에서 깨어난 우리는 완전히 정신 나간 채 이른바 도구적 사고라는 하나의 대상화된 갈망 앞에서 멍하니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도구적 사고는 여전히 이성이라고 명명되고 있지만, 해방 내지 완전한 성숙을 추구하려는 계몽주의의 출발점을 고려할 때 오래 전에 궤도를 이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맹목적 유용성으로서 산업의 시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마력의 빗자루에 관한 은유는 오늘날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동화로 간주되고 있으며, 처음부터 인류를 경고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나중에 기술적 진보 그리고 이윤 추구는 서로 뒤섞여 용해되었고, 모든 폭력 행위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는 격언에 의해 교묘하게 은폐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격분한 시민주의 문학은 나이 들어 눈먼 파우스트 (Faust)의 상을 설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참새들은 파우스트의 무덤을 파헤치는 동안, 정작 주인공인, 눈먼 파우스트는 이러한 소음을 접하며 어떤 끔찍한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말하자면 참새들의 무덤 파는 소음은 그에게는 자신의 행복한 미래의 환영으로 잘못 연상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은유가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끔찍한 문명 속에 실제로 살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치 있는 무엇으로 여기는 것은 다름 아니라 돈과 기술적 완전성입니다. 이로 인하여 (전기의 쇼트와 같은) 차단된 사고가 활성화되고, 종국에 이르러 인류를 스스로 파멸로 몰아넣는 무기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 새로운 파우스트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 천 개의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이 그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지요. 그들이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쌓아올린 기억 속에서는 놀랍게도 어느 성스러운 인도의 서사시 한 구절이 솟아오릅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강탈하는 죽음이니라,/ 여러 세계를 마구 흔들리게 만드는 자이어라.”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