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너: 아름다운 시로군요. 어째서 선생님은 윤동주의 시 가운데에서 이 작품을 선정했는지요?
나: 모든 시는 우리에게 기억의 퍼즐을 안겨줍니다. 기억은 여러 가지 편린의 상으로 우리의 뇌 속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는데, 우리는 무엇보다 시구를 통해서 이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나의 과거 체험과 관련되고 있어서 골라보았습니다. 기억하건대 50 년 전에 K중학교 교무실의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너: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고,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아니, 청년 시절의 갈망이 그대로 스며 있는 시 작품인 것 같은데요.
나: 네, 소년은 바로 나이며, 나는 바로 시 속의 소년이었습니다. 당시 영도의 청학동 버스 정류소에는 아침 시간마다 많은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나의 교복 소매에 그어진 두 개의 흰 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쌍백선”은 이른바 일류라고 하는 K 중학교를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용렬스러운 나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맨 앞의 여학생, 순이가 바라본 것은 나였을까요, 아니면 나의 교복이었을까요?
너: 당시에는 모든 학생들이 일류 이류에 상처 입고, 1등, 2등에 목숨 을 걸었지요?
나: 그렇습니다. 가난을 떨치려면, 자신만은 탁월한 성적으로 SKY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지요. 지옥 같은 세상이었고, 부모와 자식들은 모두 낙타처럼 열사의 땅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마치 만화경과 같이 휘황찬란하였지요. 간간이 하늘의 “파란 물감”, “손금” 속의 “강물” 그리고 아름다운 순이의 미소를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너: 누가 액자를 만들어 교무실의 벽에 걸어두었을까요?
나: 아마도 조달곤 선생님이 기획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 선생님은 학보 편집에 일가견이 있었고, 학생들에게 문학에 관해 많은 조언을 주셨습니다. 시를 선택하고 이해하는 힘이 참으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뒤란이 시끌시끌해서』 (2004), 『곤을동을 지나며』(2014)라는 시집을 상자했습니다. 올해에는 솔 출판사에서 『낮이 말라 밤이 차오르듯』(2021)을 간행했습니다.
너: 그렇다면 조달곤 선생님을 통해서 이 시를 접했다는 말씀인데...
나: 배명기 미술 선생님도 떠오르는군요. 배명기 선생님이 직접 시화를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배 선생님은 “멋진 목과 긴 다리를 지닌 소녀”라는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분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의 의미를 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배명기 선생님도 간간이 시를 썼지요. 그분의 시구 하나가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가을 하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바다”라고요. 나중에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북극바다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고향의 가을하늘을 떠올렸습니다. 배 선생님이 살아계시면 꼭 만나보고 싶어요.
너: 한 인간의 미적 예술적 감식능력을 키워주는 사람은 바로 은사들이로군요.
나: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은사의 말 그리고 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히 기억하곤 하지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내밀한 관계는 책을 통해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생생한 가르침이지요. 어느 누가 따뜻한 심성과 지혜를 지닌 선생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너: 이 시는 선생님의 청년 시절을 기억하는 데 무척 도움을 주는 작품이로군요.
나: 그렇습니다. 시문학과 음악은 기억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기억은 오래 전해 느꼈던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을 자극하는 향기와 같지요. 또 한 분의 은사를 잊을 수 없지요. 나는 K중학교에 부임하시던 양왕용 선생님을 버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아마도 내가 K중학교에서 만난 첫 번째 학생이었을 것입니다. 따뜻하게 대해주신 그분의 선한 마음을 잊을 수 없어요.
너: 윤동주의 시 해석이 주관적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나: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시어들을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시작품은 독자에게 다양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시는 가난과 폭정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학생들의 까까머리는 히틀러 소년단을 연상시켰지요, 교실은 60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콩나물 시루와 같았습니다. 친구들은 졸업 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요?
너: 말씀 감사합니다.
나: 감사합니다. 끝으로 한 말씀 남기겠습니다. 누군가 버스 정류소에서 만난 순이가 현재 LA에서 봉사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Hollies의 Bus Stop 을 들을 수 있습니다. (3분 10초)
https://www.youtube.com/watch?v=It75wQ0Jy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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