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레보스”는 플라톤의 철학적 대화를 담은 글로서 기원전 360년경에 탄생하였다. 이 문헌은 내용상 "정치학 (Politikos)" 그리고 "티마이오스 (Timaios)" 사이에 편입될 수 있다. 필레보스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혹은 쾌락에 관하여, 윤리적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사실 플라톤의 모든 작품들은 이른바 논리학, 물리학 그리고 윤리학 등으로 나눈 스토아 학자들의 구분에 의해 나누어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확정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그리스 정신사에서 오랫동안 민중적 전통을 지녔던 테마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항 말이다. 가령 모든 생명체에게 선한 무엇은 과연 쾌락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 속에 결정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라.
이미 신화 속에서 파리스는 지혜 (아테네), 지배 (헤라) 그리고 쾌락 (아프로디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파리스는 끝내 쾌락을 선택하고 만다. 이에 반해 소피스트 프로디코스의 글에는 헤라클레스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결국 미덕을 선택한다. 헤로도토스의 문헌에는 현자 솔론이 거론되고 있다. 솔론은 갑부인 크로시소스와는 달리 절제하는 삶을 지상의 최고 행복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올바른 삶을 결정하는 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이다.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그리고 "고르기아스 (Gorgias)"는 쾌락을 도덕보다도 앞서지 않는 것으로 다루는 반면에, "국가 (Politeia)"에서는 괘락과 입장 등의 개념과 반대되는 게 선의 이념이라고 씌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필레보스 (Philebos)"에서는 사실 문제를 끝까지 추적하여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판결하는 심판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자주 대화의 주도자로서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책에서는 이탈리아 철학의 대표자들이 서로 언쟁을 벌리고 있는 반면에, "필레보스 (Philebos)"에서는 나이든 현인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비독단적 자세를 지닌 진리의 판관으로서 등장한다. 그는 어정쩡한 견해를 지닌 젊은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프로타르코스가 가끔 소크라테스의 말을 반박하고 있으며, 필레보스가 쾌락의 문제로 대화에 끼어들고 있다. 본 문헌의 제목이 “필레보스”이지만, 정작 필레보스는 아주 드물게 짜증나는 반론을 제기할 뿐이다.
“필레보스 (φιλήβος)”란 어원에 의하면 “청춘의 애호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아테네에서 사용된 바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등장인물들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에 의해 창안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플라톤은 보다 색다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쾌락에 관한 철학적 내용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려 했는지 모른다. 가령 "고르기아스"에 등장하는 칼리클레스처럼 필레보스 역시 피곤한 듯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소극적으로 참여한다.
작품은 “아름다운 필레보스는 피곤해했다”로 시작된다. 그레서 프로타르코스는 필레보스 대신에 소크라테스에 대항하여 쾌락을 변호하는 일을 맡는다.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에게 허용한 원탁에서의 철학적 대화의 일부에 해당한다. 서언이라든가 기술적 틀은 여기서 처음부터 생략되어 있다. 토론의 결론은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데, 마지막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자리를 떠나게 된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 그렇지만 프로타르코스는 세부적 사항을 지적하며, 토론을 계속하자는 암시를 던진다.
첫 번째 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쾌락 그리고 인식이라는 두 개념을 상호 대치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두 개념 가운데 어느 것도 “보편적 선 (αγαθον)”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보편적인 선은 쾌락과 인식이 상호 혼합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다 (11a1 - 23a5). 두 번째 장은 혼합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를 세밀하게 검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는 인식에 비해 쾌락 쪽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23a6 - 59e4). 마지막 장은 쾌락과 인식 두 가지 사항이 어떻게 혼합되고, 결정되며, 나아가 하나로 결정된 혼합체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59e5 - 67b13).
플라톤은 나이든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따른다. 그는 이성의 대변자로서 어떻게 쾌락을 수용할 것인가 고민하며, 어떤 중도의 길을 택하려 한다. 메가라학파의 논쟁술은 날카로운 반론과 경합을 벌리다가 변증법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결국 진리에 도달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본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어져 있다. “그대의 명제 혹은 나의 명제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가 논쟁하는 게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가장 진리에 합당한 무엇을 찾도록 합심해야 한다.”
쾌락의 삶은 인식 없이는 쾌락 자체에 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동물적 삶과 구분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순수한 인식의 삶은 쾌락 그리고 고통 없이는 지극히 냉담할 뿐이다. 감정이 배제된 인식은 신적 이성과 같은 품위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추적할만한 대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학을 인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렇듯 철학적 인간화의 작업은 비록 추상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지만, 후기 플라톤 저작에서 자주 등장하였다. 일원성과 다양성, 제한과 무제한 등과 같은 원칙만을 경직된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플라톤에 의하면 오히려 상호 관여되는 중간의 영역 속에는 (문법과 같은) 인간적 학문과 (음악과 같은) 예술적 능력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은 제한 그리고 무제한, 존재로 향하는 변모, 변모로 향하는 원인이 존재한다.
나아가 플라톤은 불쾌한 감정을 자연 상태를 방해하는 동인으로, 쾌락을 자연 상태를 재구성하는 동인으로 이해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쾌락이 불쾌한 감정과 정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여움은 두려움과 결합되어 있고, 동경은 우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은 질투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비극 작품에서는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있으며, 희극 작품에서는 유쾌함과 불유쾌함이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은 본 문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작품 "향연 (Symposion)"의 마지막 대목에서 플라톤은 희극과 비극이 동일한 작가에 의해서 씌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은 상기한 방법으로 쾌락에 관한 물음에 세밀하게 대답하였다. 이러한 물음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크니도스 출신의 에우독소스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견유학파에 의해 이어져 나갔다.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이 문제로 대립하였고, 나중에 디오니소스 할리카르나소스는 본 문헌의 내용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신플라톤학파 사람들은 이 문헌에 대해 주해서를 남겼으며, 해석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이 문헌에 담긴 감각적으로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는 분명한 논조를 찬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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