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서두 (1 -514행)에서 상기한 내용은 헬레나에 의해 그대로 전해집니다. 어째서 잘 생긴 사람은 항상 피곤함을 느껴야 할까요? 그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미남 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헬레나가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권력자, 테오클뤼메노스는 그미에게 결혼해 달라고 강요합니다. 이때 헬레나는 프로테우스의 묘지에 숨어 지냅니다. 헬레나는 토이크로스라는 어느 군인에게서 모든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즉 그미의 가족, 그미의 조국 그리고 트로야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 헬레나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 메넬라오스는 행방불명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장에서 헬레나는 자신의 숙명에 대해 한탄을 터뜨립니다.
다음 에피소드의 첫 번째 부분 (252 - 329행)에서 “등장 가요 (Parodos)”의 모티브가 반복됩니다. 삶 자체는 이제 헬레나에게 무의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미를 동정하는 합창단원들은 결국 그미를 설득하여 살아남도록 조처합니다. 테오클뤼메노스의 여동생이자 예언녀인 테오노에는 메넬라오스의 운명을 예언을 통해서 묻기도 합니다. 헬레나와 테오노에는 자신의 처지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가, 퇴장합니다. 연이어 메넬라오스가 텅 빈 무대에 등장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관해 보고합니다. 자신의 배가 트로야로 향하다가 난파되어, 메넬라오스는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아무도 거지 차림의 메넬라오스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곳은 사랑하는 아내 헬레나가 머문 이집트 근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독백을 통하여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망연자실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는 아내를 만나기는커녕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난감함을 느낍니다.
이제 극작품의 두 번째 부분 (515 - 1164행)을 거론하기로 합시다. 맨 처음 시작되는 합창은 테오노에의 예언을 그대로 전해줍니다. 즉 메넬라오스가 어디엔가 살아 있다는 게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515 - 527행). 이어지는 내용은 다시금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에서 유형적으로 등장하는 “재인식 (Anagnorisis)” 그리고 “술책 (Mechanema)”의 모티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메넬라오스가 아내, 헬레나를 만났을 때, 그미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를 트로야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헬레나가 짧은 시간에 두 곳에서 출현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때 나이든 남자가 등장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줍니다. 즉 그리스인들이 트로야에서 되찾으려고 하던 헬레나는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뜨거운 마음으로 포옹합니다.
친애하는 J,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들이 고향인 그리스로 향할 수 있을까요? 예언녀이자, 헬레나의 친구인 테오노에는 놀라운 기지를 생각해냅니다. 그것은 메넬라오스가 바닷가에다 자신의 시신을 바다로 떠나보내는 게 바로 그 기지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신들이 메넬라오스의 죽음을 확인하고, 헬레나에게 좋은 귀향을 약속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마지막 대목 (1165 - 1692행)은 이러한 기지 내지는 술책의 이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는 어느 죽은 이집트인의 시신을 메넬라오스의 그것으로 둔갑시킵니다. 테오노에는 이러한 술책을 어느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미는 오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빠, 헬레나를 그리스로 일단 돌려 보내세요. 그미가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러면 그미는 반드시 오빠와 결혼식을 올릴 것입니다.”
사랑에 눈이 먼 오빠인 테오클뤼메노스는 동생의 말을 믿고, 헬레나를 위해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아침 헬레나는 테오클뤼메노스가 만들어준 배를 타고 출항합니다. 메넬라오스는 “사신”으로 변장하여 항해를 담당하게 됩니다. 마지막 대목 (1512 - 1692행)에서 어느 이집트 남자는 왕궁에 남아 있는 테오클뤼메노스를 찾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는 여동생의 술책을 모조리 알려줍니다. 테오클뤼메노스는 여동생에게 보복을 가하려고 하나, 이때 신들이 나타나 닭 쫓던 개 신세로 전락한 이집트의 왕을 달래줍니다. 모든 게 신의 뜻에 의해 나타났으니, 그만 여동생을 용서하라는 게 신들의 전갈이었습니다.
친애하는 J, 당신도 느꼈겠지만,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에는 신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고뇌와 갈망 그리고 의지 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적 기지가 신의 뜻과 아우르고 있다고나 할까요? “헬레나” 역시 그렇습니다. 혹시 당신은 이 작품에서 “비극적인 무엇”이 결여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건 아마도 우연 그리고 승리를 관장하는 여신 티케 (Tyche)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저히 출구를 찾지 못하여 절망하도록 영향을 끼치지만, 나중에 사람들은 갈등과 고뇌로 얽혀 있는 운명의 실타래를 스스로 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대목만 염두에 둔다면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나”는 비극 작품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뇌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메넬라오스 그리고 어느 묘지에 숨어서 자살을 기도하려는 헬레나를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분명히 비극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친애하는 J, 당신 역시 삶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계시는군요. 부디 행운의 여신, 튀케가 마련해준 행운의 실타래를 찾아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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