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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헵벨의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필자 (匹子) 2022. 11. 11. 10:19

독일 고전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의 시기의 거장, 프리드리히 헵벨 (Friedrich Hebbel, 1813 - 1863)의 5막극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1852년에 발표된 비극작품이다. 이 작품은 1852년 3월 25일에 뮌헨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작품 「마리아 막달레네」를 제외한다면, 헵벨의 모든 극작품들은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절색의 미모를 갖춘 처녀로서, 아욱스부르크 출신의 평민의 딸이다. 그미는 알브레히트 3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그미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을 반대한다. 결국 아그네스는 1345년 마녀로 몰려 도나우 강에서 익사한다.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민중가요 그리고 살육의 노래 등에 실렸고, 연극 그룹의 레퍼토리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그네스의 소재는 지금까지 60 개의 극작품으로 공연된 바 있다. 예컨대 그라프 폰 퇴링 (Graf von Törring)의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1790), 칼 오르프 (Carl Orff)의 「바르나우어 여자」 (1947) 등이 있다.

 

헵벨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세의 권력 구조에 대해서도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충실히 재현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욱이 “사회극 ein soziales Drama” 집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헵벨이 아그네스의 소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그네스의 비극적 운명의 어떤 “기이함” 때문이었다. 헵벨에 의하면 그미의 외적 아름다움이 거의 본능적으로 어떤 행동, 심지어는 복수를 동반하는 어떤 행동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그네스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높은 권력의 상부 구조에 수동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어떤 비극적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개인의 자기 요구 그리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질서로서의 국가의 관심사 사이의 형이상학적으로 기초된 대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 1막에서 헵벨은 시민의 딸 아그네스를 등장시킨다. 이로써 우리는 그미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미와 공작의 아들 사이의 애정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아그네스와 알브레히트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중재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한다. 알브레히트는 그미가 평민이기 때문에 문제를 겪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렇지만 아그네스의 입장은 그와는 다르다. 그미는 처음부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에 서로 계급 사이의 결혼은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올린 즉시 아그네스는 스트라우빙에서 자신의 시체를 안치할 교회당을 건립하게 한다.

 

알브레히트의 아버지 에른스트 공작은 아그네스를 살인하려고 계획을 추진한다. 그러나 아그네스와 에른스트 공작은 작품 내에서 함께 등장하지 않는다. 제 3막에 등장하는 에른스트 공작은 아들이 결혼식을 올린 뒤에 세 명의 법률가들로 하여금 아그네스에 대한 사형 선고를 발급하게 한 다음, 그것을 일년동안 감추어둔다. 그는 자신의 조카에게 제후의 작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병약한 조카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자신의 나라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에른스트 공작은 판결문에 서명한 다음,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거대한 바퀴가 그미 위에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그미의 목숨은 바퀴를 돌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판결문은 다음과 같이 공언한다. 즉 아그네스는 “불법적인 결혼”을 위해서 공작의 아들을 유혹하는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미는 평민의 딸로서 모든 기존하는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미는 “세계의 질서를 방해하고, 부자 관계를 이간질했으며, 민중을 제후로부터 소외시켰다”. 이러한 범죄는 기존하는 법의 기본적 강령에 의해서 판결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중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죄인가 무죄인가? 하는 물음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오로지 원인과 결과를 물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듯 에른스트 공작은 오로지 봉건적 질서 그리고 국익이라는 테두리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서로 사랑하는 젊은 남녀는 그들의 감정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으며, 개인적 행복을 관철시키려고 버티고 있다.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은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 아닌가?” 여기서 알브레히트와 아그네스의 태도는 마지막 심급에 있어서 무정부주의적으로 행동하려는 계몽적 시민의 태도를 고수하는 셈이다.

 

그러나 헵벨의 드라마는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충실하게 반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뒤이어 질서의 변증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인적 경향을 다시금 번복시키려고 강요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구조는 1848년 시민 혁명의 문제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알브레히트는 다음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국가 질서의 필연성 그리고 개인의 자기실현의 권한 사이에는 어떤 극단성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러한 극단적 특성을 연결시켜주는 자가 바로 제후의 과업이라는 사실 말이다.

 

알브레히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는 아그네스를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한다. 에른스트 공작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모반을 일으킨 자신의 아들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준다. 한 가지 조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일 년 후에 판결문을 읽는 것을 지칭했다. 다시 말해서 사전에 개인의 행위를 보편적인 그것과 연결시키거나, 종교적 관련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법관은 아들이 범한 죄에 대한 판결을 집행한다는 게 바로 그 조건문이었다.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유디트」, 「마리아 막달레네」와 함께 오늘날까지 헵벨의 가장 잘 알려진 극작품이다. 헵벨의 동시대인들은 궐기하는 시민들보다는, 국가의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은 헵벨의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정치적 전복에 대한 해설서라고 이해하였다. 문예학자 게르비누스 (Gervinus)는 1852년 헵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불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즉 이 작품 속에는 필연성이 자연 법칙의 우위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독문학자들은 평민의 딸에 대한 살인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P. G. 클루스만은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라는 지상의 아름다운 육체 속에 신이 구현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가령 만약 아그네스 베르나우어가 어떤 절대적 존재로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지상의 유한한 육체 속에서 필연적으로 사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는 상기한 두 가지 해석의 방향 (복고주의적 해석, 종교적 해석)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게 된다. 그럼에도 헵벨의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오랫동안 국가 체제를 무조건 합법화시키는 드라마로 해석되곤 하였다.

 

가령 이 작품은 히틀러 치하에서 자주 공연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현저히 사라진다. 1976년 바이에른의 극작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 (Fr. X. Kroetz)는 이 작품을 새롭게 개작하였다. 주인공 아그네스는 술취한 이발사의 딸로, 알브레히트는 부유한 사장 아들로 등장한다. 여기서 알브레히트는 그미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민중들은 그미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크뢰츠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신랄하게 혹평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