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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슈니츨러의 사랑의 장난

필자 (匹子) 2021. 6. 12. 11:30

아르투르 슈니츨러 (A. Schnitzler, 1862 - 1931)의 극작품 「사랑의 장난 (Liebelei)」은 3막 희극으로서 1895년 10월 9일에 부르크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극작가는 바로 이 작품을 통하여 처음으로 무대 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흔히 슈니츨러는 “영혼의 해부학자, 도덕의 서술자, 사회 비판가 그리고 광신적인 진리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사랑의 장난」을 통하여 그는 빈 (Wien)의 정감 넘치는 민속극의 분위기를 사회 심리극으로 전환시킨다. 극의 저변에 도사린 풍자적 요소는 극중 진행 과정에 드러나는 모호한 비극을 은밀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테오도어 그리고 프리츠는 빈 대학의 학생들이다. 두 남자는 멋진 외모를 지닌 부유한 가정의 출신이다. 두 사람은 여자 친구 미치 그리고 크리스티네와 함께 프리츠의 방에서 기분 좋게 만찬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두 남자의 부모가 부유하지만, 두 여자의 부모는 매우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기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에는 언제나 돈 문제 아니면 계급 갈등이 마치 장미의 가시처럼 개입되는 법이다.) 촛불이 은은하게 비치고, 나지막한 피아노 음악은 즐거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선남선녀들에게 약간의 술이 오고간다. 그저 상대방을 칭찬하는 겉치레의 말들을 내뱉곤 한다.

 

만찬을 주선한 사람은 테오도어였다. 그는 평소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미치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하는 척하면서, 미치를 만날 수 있는 그럴듯한 계략을 꾸민 것이다. 지금까지 프리츠는 상류층에 속하는 어느 유부녀와 성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테오도어는 친구로 하여금 시립 극단 음악가의 순진한 딸 크리스티네 바이링과 가벼운 연애를 즐기도록 조처한 것이다. 

 

미치는 크리스티네의 친구였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테오도어 역시 자연스럽게 미치를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두 남자의 이성관은 한편으로는 개방적이고 자유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책임하다. 가령 테오도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휴식을 위해서 그냥 여자들과 사귀어야 해. 그게 만남의 의미야. 여자들이란 우리의 휴식을 위해서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프리츠는 테오도어에 비해 훨씬 세심하다. 크리스티네는 프리츠에게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순간적으로 즐기고 차버릴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프리츠는 그미와 단둘이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주위는 고요하다.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상대방을 끌어안는다. 그미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프리츠의 가슴에 느껴진다. 일순 그미는 프리츠가 정복했다 (?)고 하는 “검은 드레스의 여인”에 관해 질문한다. 

 

이때 그는 그미의 말문을 가로막아버린다. “질문하지 마. 아름다운 여자였을 뿐이야. 너와 함께 있으면, 세상은 그냥 가라앉지. 그것으로 끝이야.” 시간의 영속성은 프리츠에게는 서로 무관한 순간들을 얼기설기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순간이야 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원”이라는 것이다.

 

흥겨운 분위기는 어느 신사의 등장으로 깨지고 만다. 그는 “검은 드레스를 착용한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의 손에는 프리츠가 여인에게 보낸 구애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프리츠와 신사는 단둘이 대화를 나눈다. 두 남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 관해서 갑론을박하고 있다. 이윽고 신사는 젊은 바람둥이에게 쌀쌀맞은 어조로 결투를 신청한다. 아내의 정조를 강탈한 작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큰소리로 말한다. 프리츠는 이에 화들짝 놀란다. 결투야 말로 죽음의 판결이 아닌가? 사태의 심각성은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제 2막이 시작된다. 소시민의 허름한 다락 가옥에서 크리스티네는 아버지와 거주하고 있다. 옆집 여자인 빈더 부인이 찾아온다. 그미는 평소에 이웃 사람들의 삶에 참견하며, 여러 가지 사항을 충고한다. 그러나 그미의 충고는 이웃에게 언제나 간섭으로 들릴 뿐이다. 빈더 부인은 결혼의 장점을 말하면서, 크리스티네를 자신의 사촌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빈더 부인의 사촌은 무척 예의바른 젊은이이며, 확실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월급봉투가 두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네의 아버지는 빈더 부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버지는 행복과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에서 무슨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다. 즉 극작가 슈니츨러는 동시대 사회의 얽혀 있는 인간관계를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빈더 부인의 사랑 없는 냉혹한 결혼관 그리고 아무 남자에게 몸 맡기는 미치의 무책임한 방종함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경제적 안전 그리고 이윤의 측면에서 남성을 고찰할 뿐이다. 다시 말해 빈더 부인은 우직한 사촌의 두툼한 월급봉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미치는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민 프리츠의 집을 몹시 부러워한다.

 

크리스티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이때 빈더 부인은 그미를 남자에게 몸 바친 뒤 배신당한 걸레처럼 간주하고, 냉정히 돌아서버린다. 프리츠가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프리츠의 눈앞에는 “아름답고 달콤한 그미의 얼굴”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어느새 크리스티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리츠는 그미를 찾아가 어디론가 잠깐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는 그저 핑계일 뿐이다. 사실 크리스티네를 행여나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결투하기 전에 그미와 작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크리스티네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프리츠는 소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바라보게 된다. 가난하지만 아늑한 방에는 가화 (假花)가 있었고, 슈베르트 흉상이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벽면의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죽기로 작심한 프리츠의 눈에는 크리스티네의 안온한 방이 마치 천국의 안락함으로 비치는 게 아닌가? 바로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거짓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 만약 그가 크리스티네의 방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삶을 속죄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프리츠는 결투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어디론가 도주했는지 모른다.

 

이틀 후에 크리스티네는 제 3의 여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접한다. 프리츠는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따먹고 차버리는”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 그리고 그가 결투로 사망하여 묘지에 안치되었다는 점 등이 바로 그 소식이었다. 프리츠가 자신의 거짓으로 인해 사망하자, 크리스티네는 마침내 자신도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미는 절망적으로 흐느끼면서, 집을 뛰쳐나가면서, 결국 자살한다.

 

슈니츨러 작품의 비극적 결말은 레싱 그리고 실러의 시민 비극과 비교될 수 있다. 레싱과 실러의 시민 비극의 주인공은 어떤 화해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으나, 「사랑의 장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간계와 사랑」의 여주인공 루이제 혹은 「에밀리아 갈로티」의 에밀리아는 최소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사회적 강요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유토피아를 위해서 스스로 희생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슈니츨러 작품의 여주인공 크리스티네는 그저 절망만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특성은 G. 하우프트만의 작품 「해뜨기 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개인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익명의 초인적 힘에 대해 그저 속수무책이며, 처음부터 그것에 패배해 있다. (자본주의의 전체적 폭력은 전쟁의 기운으로 돌변하여 19세기 말에 유럽을 서서히 강타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 사랑의 장난은 필연적 죽음으로 끝난다. 크리스티네의 방에는 어떤 그림이 우의적으로 걸려 있다. 거기에는 겨울 창문을 내다보는 어느 처녀가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제목은 “버림받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