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54

오든의 시: 조형예술 박물관

“고통에 관해서 그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과거의 거장들은 얼마나 인간의 태도를 잘 이해했던가, 어딘가에서 누군가 밥을 먹고 창문을 그냥 열어 제치거나 혹은 어디론가 어슬렁거리는 동안 어떤 듣지 못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곤 했음을. 혹은 과거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적의 탄생을 고대하는 동안에도 틀림없이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 하지 않은 채 나무 근처 얼어붙은 연못에서 썰매 타기에 골몰할 뿐. 과거의 거장들은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순교의 정도, 전율의 끔찍함이 발생하는 바로 그때 지저분한 구석에서는 개들이 개의 삶을 이어가고 고문하는 자의 말(馬)이 나무에다 죄 없는 엉덩이를 쓱쓱 비비고 있었다는 것을. About suffering they were never wrong,/ The Old ..

22 외국시 2022.04.11

서로박: 만델스탐의 시, 「살아있는 우리는」

흔히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요. 폭정과 독재의 치하에서는 바른 말과 올바른 글이 오히려 작가에게 위험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발등을 찍기 위해서 창작에 임하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술적 창조물은 때로는 당사자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시 한 편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일까요? 실제로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오시프 만델스탐 (Ossip Mandelstam, 1891 - 1938))이 바로 그 시인입니다. 오시프 만델스탐은 유대인 피혁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시적 재능을 드러내었습니다. 16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여행하여, 소르본 대학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정도로 조숙해 있었습니다. 만델스탐은 1..

22 외국시 2021.11.14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3)

7.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첼란은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가령 이반 골 (Ivan Goll, 1891 - 1950)의 아내, 클레어 골은 첼란이 1953년에 간행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서 죽은 남편의 시구를 마구 베꼈다고 주장하였다. 시적 표현들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다른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굳이 잘못 아닌 잘못을 찾는다면 그것은 체험현실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발견되는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전후 독일 문학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시,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소지품 목록」이 체코의 시인 리하르트 바이너 (R. Weiner, 1884 - 1937)의..

22 외국시 2021.10.21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2)

4. 아도르노는 루마니아 출신의 노시인의 작품을 읽고 무척 놀라워했다. 시편들은 간결하지만, 주어진 사물과 사건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정교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경한 표현, 그것은 어쩌면 “독일 고전주의의 일그러진 일면” (E. Kanterian)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고색창연한 것 같으면서도 진부하지도 않고, 투박한 생명력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그런데 시편 가운데에는 「피의 푸가」라는 게 있지 않는가? 시편을 읽으면서 아도르노는 자신의 놀라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로젠크란츠 부인의 부탁을 이행하겠노라고 구두로 약속한 뒤에,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즉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남편의 시편의 발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게 편지의 내용이었다. 한 가지 조건이란 어떠한 ..

22 외국시 2021.10.21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1)

“아내여, 내가 죽으면, 당신에게 유산으로 남길 게 있어. 그건 나의 발이야. 내 발은 아주 억세고 잘 생겼어. 동쪽 발이거든. 서유럽에서는 이런 발을 볼 수 없을 거야. 어릴 때는 맨발로 눈 덮인 들판을 뛰어다녔고, 수감되어 있을 때는 동토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했어. 거기에는 자갈과 뾰족한 돌들이 많았지. 고문 형무소에서, 우라늄 탄광 속에서도 나의 발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거든. 발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난의 삶을 헤쳐 나오지 못했을 거야.” 모제스 로젠크란츠 (Moses Rosenkranz, 1904 - 2003)는 95세 생일에 그렇게 말했다. 로젠크란츠는 1904년 부코비나의 작은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외감, 가난, 냉대 등은 그의 입을 굳게 다물게..

22 외국시 2021.10.21

서로박: 소네트 패러디 (3)

7. 나: 지금까지 현대 독일 시인들의 소네트 패러디를 살펴보았습니다. 요약하건대 과거의 소네트는 주로 사랑의 슬픔을 시적으로 정갈하게 형상화하는 반면에, 오늘날 독일 시인들은 이러한 소네트의 정서를 야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순애보 (純愛譜)로서의 시가 진부하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정통적 소네트를 야유함으로써 그들이 비판하려고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법적 장애물은 남김없이 철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 오늘날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자유는 극대화되었지만, 이로 인해 명작이 태동할 여건은 유감스럽게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등의 악재로부터 해방되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는 예술가의 치열한 사고에 훼방을 놓는 독약으..

22 외국시 2021.09.05

서로박: 소네트 패러디 (2)

너: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하는 시는 울라 한 (1946 - )의 「고상한 소네트 (Anständiges Sonett)」라는 작품입니다. “어떤 고상한 시를 한 번 써 봐” (St. H.) 이리 와서 꽉 잡아 난 가볍게 맛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처음엔 세 번 키스해 줘, 기분 좋은 곳에. 입에서 입으로 나를 건드려 줘. 이제 한 번 눈앞에서 내 둥근 것들을 돌리고 내가 비밀리에 너의 안으로 뛰어들게 해. 어떻게 몸이 아래로 위로 향하는지 보여줘. 나는 외치다 침묵해. 내 곁에 있어. 기다려. 다시 올게 나에게 너에게 그다음엔 “아름다운 오래된 노래의 반복 운처럼 완전하게” 태양 빛 고리를 내 배에다 문질러, 한번 그리고 항상. 나의 눈꺼풀은 그냥 열려 있어. 두 입술 또한. (”Schreib doch m..

22 외국시 2021.09.05

서로박: 소네트 패러디 (1)

다음의 글은 나의 논문 "고상한 소네트에서 조야한 소네트로"의 일부이다. 나: 소네트는 현대인의 사랑과 성을 담기에는 진부한 형식, 다시 말해 헌 부대에 불과하지요. 현대인들이 목숨 건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는 이제 드뭅니다. 사랑을 가로막던 장애물들이 오늘날 거의 철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을 처절하게 노래할 필요성이 사라졌어요. 이에 반해 과거에는 구태의연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이 온존하였으므로, 죽음을 각오하는 사랑의 열정은 실제로 출현했고, 이는 소네트를 통해 묘사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피에르 아벨라르 (1079 - 1142)는 엘로이즈라는 아리따운 처녀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연정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끝내 살을 섞었습..

22 외국시 2021.09.05

샨도르 페퇴피의 시 (7) 인민의 노래

인민의 노래 일어나, 고향 마기야르가 외치고 있어, 지금은 투쟁을 위해 결집할 때야, 자유롭게, 혹은 노예로 살지를 너희는 선택하라, 명예와 정당성이 문제야. 우리의 조상 신 앞에 맹세해 봐 더 이상 안 된다고 독재자 앞에서 허리를 굽혀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우리는 노예들이었어, 우리는 조상의 정신을 배반하며 살았어. 자유가 완전히 파괴된 이후로 그들은 무덤 속에서 휴식하지 못해. 우리의 조상 신 앞에 맹세해 봐 더 이상 안 된다고 독재자 앞에서 허리를 굽혀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비겁하게 싸우려 하지 않는, 거사를 망설이는 자식을 저주해. 조국의 명예보다도 자신의 안위, 목숨에 그저 안달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조상 신 앞에 맹세해 봐 더 이상 안 된다고 독재자 앞에서 허리를 굽혀서는 더 이상 안 ..

22 외국시 2021.09.01

샨도르 페퇴피의 시 (6) 내가 부엌 안으로

내가 부엌 안으로 파이프에 그냥 불 댕기기 위해서 내가 부엌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핑계 삼아 그렇게 하려 했을 때 파이프에는 불씨 없이 불이 붙었다. 그래, 대가 없이 불이 붙었지, 허나 그 때문에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야, 일순 나는 혼자 훔쳐보고 있었다, 안에는 날씬한 처녀가 있다는 것을. 그미는 순식간에 불을 지폈어 아궁이는 푸드덕 불이 붙고 있었다, 그미의 두 눈동자 속에서는 수많은 불길이 바다처럼 번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민 나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마력에 사로잡혔지. 파이프 담배는 그냥 꺼져버렸는데, 내 심장은 밝은 화염으로 가득 찼다. Hinein ich in die Küche trat … Hinein ich in die Küche trat, Für meine Pfeif' ic..

22 외국시 202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