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서로박: 소네트 패러디 (1)

필자 (匹子) 2021. 9. 5. 09:35

다음의 글은 나의 논문 "고상한 소네트에서 조야한 소네트로"의 일부이다.

 

나: 소네트는 현대인의 사랑과 성을 담기에는 진부한 형식, 다시 말해 헌 부대에 불과하지요. 현대인들이 목숨 건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는 이제 드뭅니다. 사랑을 가로막던 장애물들이 오늘날 거의 철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을 처절하게 노래할 필요성이 사라졌어요. 이에 반해 과거에는 구태의연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이 온존하였으므로, 죽음을 각오하는 사랑의 열정은 실제로 출현했고, 이는 소네트를 통해 묘사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피에르 아벨라르 (1079 - 1142)는 엘로이즈라는 아리따운 처녀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연정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끝내 살을 섞었습니다. 나중에 아벨라르는 그미의 숙부에게 잡혀서 참혹하게 거세당했습니다. 수녀원에서 감금된 엘로이즈는 훗날 아벨라르의 아들을 낳았지요. 루소 (1712 - 1778)는 『줄리, 혹은 새로운 엘로이즈』(1761)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던 사회적 제약을 통렬하게 비판하였고, 괴테 (1749 - 1832) 역시 이에 착안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1774)를 집필하였지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거세와 같은 끔찍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쉽게 사랑을 나누고, “쿨”하게 헤어지지 않습니까?

 

너: 유럽에서는 혼전동거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의미는 유럽인들에게 더 이상 “성 생활을 사회적으로 허용 받는 통과의례”는 아니지요. 그것은 유럽에서 “오랜 동거 끝에 결심한 출산의 전 단계”로 축소화되었습니다. 2006년 프랑스의 통계에 의하면 남자는 평생 평균적으로 여섯 번 결혼하고, 여자는 평균적으로 세 번 결혼한다고 합니다.

 

나: 유럽인들이 과거의 소네트를 진부하다고 여기는 게 바로 그 때문이군요. 이어지는 작품은 로베르트 게른하르트 (1937 - 2006)의 소네트「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가장 잘 알려진 시 형태를 비판하기 위한 자료들 (Materialien zu einer Kritik der bekanntesten Gedichtform italienischen Ursprungs)」의 전문입니다.

 

나는 소네트를 찝찝한 배설로 여겨, 그 자체 편협한

엄격하면서도, 약간 좋지 않은 것으로 소네트를.

누가 그걸 쓰는지 알려 하는 짓거리 자체가 나를

정말 미치도록 아프게 해. 오늘날 그따위 우중충한

 

개똥을 쌓아올리는 자를 밝히는 일은, 완전하게

한심한 유형이 그따위 짓을 행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으로 나의 귀한 하루 시간을 잡치게 만들거든.

그건 나에게 장애물로 작용해. 그따위 질퍽하게

 

싸질러놓은 똥 덩어리의 수음 행위로 인해

내 생각을 차단시키게 만드는 데 대한 분노는

그 새끼에 대한 공격욕구를 벌컥 솟구치게 해.

 

절대로 똥구멍을 손으로 자극하지 않아, 나는.

정말로 손장난 치지 않아. 맹세코 알지 않으려 해.

소네트를 너무나 찝찝한 배설로 여기니까, 나는.

 

Sonette find ich sowas von beschissen,

so eng, rigide, irgendwie nicht gut;

es macht mich ehrlich richtig krank zu wissen,

dass wer Sonette schreibt. Dass wer den Mut

 

hat, heute noch so’n dumpfen Scheiss zu bauen;

allein der Fakt, dass so ein Typ das tut,

das kann mir echt den ganzen Tag versauen.

Ich hab da eine Sperre. Und die Wut

 

darüber, dass so’n abgefuckter Kacker

mich mittels seiner Wichsereien blockiert,

schafft in mir Agressionen auf den Macker

 

Ich tick nicht, was das Arschloch motiviert.

Ich tick es echt nicht. Und will’s echt nicht wissen:

Ich find Sonette unheimlich beschissen.

 

너: 시인은 유머러스한 시어로 소네트를 비아냥거리고 있군요.

나: 네. 게른하르트는 소네트에 대해 처음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네트는 “편협하고 엄격한” 시 형태라고 합니다. 그것은 “찝찝한 배설”에 불과하며, 사랑의 욕구와 함께 돌출하는 성적 배설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소네트를 그 자체 “우중충한 개똥”으로서, 창조적이고 유익한 사고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로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시구 하나하나는 소네트를 쓰는 시인의 “수음행위”의 소산이며, “질퍽하게 싸질러놓은 똥 덩어리”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너: 놀랍게도 시인은 소네트의 시적 기능을 비판하기 위하여 소네트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군요?

나: 그렇습니다. 원문을 읽어보면, 우리는 놀라운 운율 그리고 기막힌 각운을 음미할 수 있어요. 가령 “똥 덩어리 (Kacker)”는 “그 새끼 (Macker)”라는 시어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지요. 이는 독일 독자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늘날 독일의 독자들은 “페트라르카의 정갈한 라우라 상”에 대해 식상해 있거든요. 게른하르트의 코믹 작품은 규칙의 파괴를 통하여 생명력을 이어나가지요. 앞의 시는 현대인의 사상 감정이 오래된 형식적 틀에 차단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3.

너: 멋진 설명이로군요. 그런데 “페트라르카의 정갈한 라우라 상”이 무슨 뜻인지요?

나: 라우라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1304 - 1374)의 소네트에서 등장하는 여인입니다. “칸초니에레”로 명명되는 그의 소네트는 1327년 “라우라”와의 만남으로 인해 탄생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페트라르카는 “라우라의 시인 (Poeta Laureatus)”으로 추앙 받았지요. 라우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의 이상을 보여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라우라가 실제 어느 귀한 가문의 유부녀가 아니라, 오직 마돈나 상을 통해 투영된 상상의 여인이라는 가설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라우라는 거울 속의 미녀로서, 가장 가까이 있으나, 실제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장미라고 합니다.

 

너: 그렇다면 라우라는 미구엘 세르반테스 (1547 - 1616)의 『돈키호테』(1605/ 1615)의 주변인물 둘시네아와 비슷하군요. 주인공은 그미를 그리워하지만, 실제로 찾으려고 나서지 않아요. 충직하고 경건한 그 바보는 연인의 상이 파괴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미와 상봉하지 않으려 합니다. 둘시네아는 실제 “토보소”에 거주하는 “추녀 (醜女)”였지만, 주인공의 마음속에 “혼을 앗아가는 헬레나”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나: 키르케고르 (1813 - 1855)도 그러했어요. 레기네 올센과의 결혼을 끝내 포기한 것은 그미에 관한 고결한 상이 파괴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우라 역시 실제 현실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여인 (la femme introuverble)”입니다. 만약 페트라르카가 그미를 실제로 만났더라면, 가슴 설레는 연애시들은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과거의 시인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였습니다. 존 던 (1572 - 1631) 그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 - 1616) 역시 달콤한 소네트를 남겼지요. 특히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는 부분적으로 동성연애의 정서가 배여 있지만, 셰익스피어가 추구한 “가장 고결한 마돈나 (madonna angelicata)”로서의 “어두운 부인 (dark lady)”은 실존하던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미는 페트라르카의 여성상으로부터 약간 벗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소네트의 역사에서 어떤 중요한 특징이 출현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에 이를수록 임에 대한 애틋하고 처절한 사랑의 정조는 사라지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가령 샤를 보들레르 (1821 - 1867)의 『악의 꽃』(1857)에 실린 시 절반이 소네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시편은 이른바 카를 로젠크란츠 (1805 - 1879)가 말하는 “추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 - 1926)는 연작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에서 뮤즈와 죽음을 다룬 바 있습니다.

 

4.

너: 바로 그 점이 중요해요. 19세기의 소네트들은 애틋한 사랑의 정조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정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지요. 여성 해방의 경향 때문일까요?

나: 그럴 수 있습니다. 혹은 19세기 이후 유물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몰라요. 가령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 - 1956)는 소네트 형식으로 일련의 외설시를 집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설시를 “사랑의 마르크스주의적 전복”이라고 표현했지요. 이때 젊은 브레히트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남자의 고환에 정액이 가득 차 있을 때 모든 여자는 아프로디테로 보인다.”고 말입니다.

 

너: 브레히트는 여성을 비하하는, 경박한 유물론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지요.

나: 그래도 그의 외설시는 최소한 시민주의 속물들의 표리부동한 내면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지요. 다음의 작품은 하이너 뮐러 (1929 - 1995)의 유작, 「처녀성의 금기에 관하여 (Über das Tabu der Virginität)」라는 소네트입니다.

 

이 얇은 막 주위에, 즐김이 가로막혀 있지,

미덕에 대한 투입은 어떠하며, 비명 소린 어떠한가?

결혼 전 그걸 잃는 여자는 부부의 침대에

몸 눕히지 않는다. 거기 돈이 놓여 있기도 해.

 

그래도 사람들은 말한다, 실험 삼아 장화 속에

충분히 집어넣곤 하지 않으면 그 다린 뭐 할 건가하고.

주어진 틀을 박차지 않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야.

(두려워 마! 위험한 건 침대 오직 시트뿐이야.)

 

하여 한 남자는 여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검증되지 않는 자들의 노력으로 힘 죄다 빠지면서

마지막엔 반드시 돈만 지불하지, 검증되지 않은 여자에게.

 

무엇이 그를 어리석게 만드는가, 요리사보다도

식객이 식사를 더 찬양한다는 걸 모르니까. 언제나

요리 행위보다 식사 행위가 훨씬 큰 축복이니?!

 

Um dieses Häutchen, hindernd das Vergnügen

Welch Aufgebot an Tugend, welch Geschrei?

Die nicht im Ehbett es verlor, kommt nicht zu liegen

Ins Ehbett. Außer es liegt Geld dabei.

 

Doch heißt es auch: was hat ein Bein getan

An dem nicht probweis schon genug Stiefel staken

Mann ist nicht Mann, bricht er nicht selber Bahn!

(Seid ohne Furcht! Gefahr läuft nur das Laken.

 

So bringt ein Mann, an Weibern sich beweisend

Mindernd mit Fleiß der Unerprobten Zahl

Sich um den Preis am End: die Unerprobte

 

Was macht den dumm, daß er nicht weiß, es lobte

Mehr als der Koch der Esser stets das Mahl

Umsoviel mehr als Essen seliger ist denn Kochen?!

 

 

 

너: 뮐러가 성욕만의 테마를 다룬 적은 한 번도 없더군요.

나: 네. 성의 테마는 다른 테마와 뒤섞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어요. 가령 피에르 쇼데 드 라클로 (1741 - 1803)의 『위험한 관계』(1782)를 개작한 뮐러의 극작품, 「사중주」(1981)는 어떤 혁명 운동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너: 앞의 시는 시민주의의 통념을 비판하고 있군요.

 

나: 시민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혼전 순결을 강요합니다. 뮐러는 “결혼 전 그걸 잃는 여자는 부부의 침대에/ 몸 눕히지 않는다.”고 묘사합니다. 통념에 의하면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순결이 강조되는 시민사회에서 여성은 성 경험을 쌓을 수 없습니다. 독일은 사창을 폐지하고, 매춘을 나라에서 관리하는 이른바 공창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남자들은 가령 함부르크의 공창 지역인 상 파울리에 가서, 자신의 “”을 “장화 속에/ 충분히 집어넣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힘 빼고, 그저 “돈만 지불”할 뿐이지요.

 

너: 시인은 브레히트의 극작품 「남자는 남자」를 풍자하고 있어요. “주어진 틀을 박차”지 않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표현 말입니다.

나: 작품은 젊은 남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때문에 희생되는 자들은 젊은 여성들 가운데 오직 몸 파는 여자들이지요.

너: 마지막 연은 결혼 행위와 성행위를 제각기 요리 그리고 식사로 비유하고 있어요. 시민 사회에서 젊은 남녀의 성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침 뱉지 말라고 합니다. 입 속에 고인 침은 깨끗하지만, 바깥으로 튀겨진 침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선인가요?

 

나: 뮐러의 시는 그와 유사한 위선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찬양하고, 두 사람의 “요리사”, 늠름한 신랑 어여쁜 신부를 우러러 봅니다. 그러나 “식객” (선남선녀)의 동거생활은 찬양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은 불륜으로 매도되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