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1)

필자 (匹子) 2021. 10. 21. 11:37

아내여, 내가 죽으면, 당신에게 유산으로 남길 게 있어. 그건 나의 발이야. 내 발은 아주 억세고 잘 생겼어. 동쪽 발이거든. 서유럽에서는 이런 발을 볼 수 없을 거야. 어릴 때는 맨발로 눈 덮인 들판을 뛰어다녔고, 수감되어 있을 때는 동토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했어. 거기에는 자갈과 뾰족한 돌들이 많았지. 고문 형무소에서, 우라늄 탄광 속에서도 나의 발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거든. 발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난의 삶을 헤쳐 나오지 못했을 거야.” 모제스 로젠크란츠 (Moses Rosenkranz, 1904 - 2003)는 95세 생일에 그렇게 말했다.

 

로젠크란츠는 1904년 부코비나의 작은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외감, 가난, 냉대 등은 그의 입을 굳게 다물게 한다. 로젠크란츠는 14세까지 말문이 막힌 채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벙어리로 여길 정도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가족들은 농장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피신한다. 이때 그의 손에 들려졌던 것은 독일 시인 울란트 (Uhland)의 시집이었다. 불과 15세의 나이의 소년은 죽는 날까지 30편의 위대한 시를 쓰리라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이로부터 45년 이후일 줄이야, 어느 누가 짐작했겠는가? 1918년 어느 날 마을 근처에서 어느 병사가 자살한 것을 목격했을 때 그의 목청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온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죽음은 시인의 말문을 트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서 중첩되어 나타난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폭력은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1941년 독일 군인들은 루마니아에 진군해 들어와서, 유대인 로젠크란츠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수용소에서 그는 나중에 훌륭한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낼 파울 첼란 (Paul Celan, 1920 - 1970)과 임마누엘 바이스글라스 (Imanuel Weißglas, 1920 - 1979)를 만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고, 두 젊은이의 나이는 19세였다. 그와 첼란은 몰다우 지역으로 끌려가 도로 포장 공사에 배치되었고, 바이스글라스는 트란스니스트린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1944년 겨울은 유독 매서웠다고 한다. 히틀러 군대가 패전을 거듭하던 어느 겨울밤 로젠크란츠는 야밤을 틈타 강제 노동 지역을 혈혈단신 탈출한다. 그리하여 로젠크란츠는 1945년 고향 사람들과 해방을 맞이한다. 이제 독일 군인은 물러가고, 소련 군인들이 루마니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로젠크란츠의 시련은 계속된다. 1947년 어느 봄날 소련의 비밀경찰은 그를 길에서 강제로 연행한다. 국제 적십자사의 권유로 부카레스트에서 독일 전쟁 포로를 돕다가, “반공적 저항 그룹의 선동자”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루블리안카 고문 형무소는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건장한 사내라 하더라도 거기서 3개월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로젠크란츠는 그곳에서 1년을 버틴다. 그후 그는 레포르트토 그리고 부티르카 등의 형무소로 송치된다. 10년의 감옥 생활 동안 가장 견디기 힘든 곳은 북극에 가까운 노릴스크 형무소였다. 그곳은 일년 내내 눈이 내리는 추운 지역이었다. “푸르가”는 살을 에어갈 정도로 강하게 부는 북풍이었다. 이 시기에 로젠크란츠는 아연과 우라늄 탄광에서 밤낮으로 일한다. 취침 시간과 식사 시간 외에는 그에게는 조금도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작품은커녕 편지 한 통 쓸 여유도 없었다.

 

2.

1957년 그는 나이 52세 때 자유의 몸이 된다.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후르시초프는 스탈린의 우상 숭배 및 경제 정책을 비판한다. 이때 사람들은 수용소의 강제 노동이 경제적으로 별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소련 강제 수용소는 이 시기에 해체된다. 출옥 직후에 로젠크란츠는 시 한 편 집필한다. 그것은 「끝으로 향하여」라는 시로서 나중에 60년대 서독에서 발표된다.

 

이제 마침내 벗어날 시간이 다가왔지

사랑하는 세계여 난 너에게서 미끄러져

강물처럼 이 땅에서 그냥 흘러가야 해

양쪽의 가치 있는 강둑을 내버려 둔 채

 

비록 난 저주스러운 곳을 기억하지만

아름다운 강변 사랑스런 자리 많으나

나의 방랑은 흥겹지만은 않았고

나 역시 여러 암흑을 더듬거렸으니까

 

이제 끝없는 먼 곳은 사라지고 말았지

빛과 물만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먼 곳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지, 내가

대양 속의 한 방울로 누워 있음을

 

(Es ist gekommen abzunehmen/ vielliebe Welt ich muß dir schon entgleiten/ muß wie ein Fluß aus diesem Lande strömen/ die Ufer lassend wert zu beiden Seiten // Die schönen Uferreich an lieben Plätzen/ auch wenn ich recht erinnre an verhaßten/ denn meine Wandrung war nicht nur Ergötzen/ ich mußte auch durch Finsternisse tasten // Nun ists vorüber unbegrenzte Ferne/ nur Licht und Wasser nimmt mich still entgegen/ sie eilt mich nicht und wartet bis ich lerne/ mich wie ein Tropfen in ihr Meer zu legen).

 

10년간 시인을 옥죄이던 것은 감방 문 사이로 스며드는 찬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강둑에 차단된 “저주스러운” 댐이었을까? 상기한 작품에서 시인은 북극 해안으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을 묘사한다. “물방울”의 흐름은 시인 자신의 고달픈 역정으로 비유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두 번째 연이다. 아름다운 강변이 있지만 그는 이곳에서 편안한 시간을 만끽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둠 속” 갱로에서 더듬거리며 광부로서 수인으로서 살았기 때문이다.

 

출옥했을 때 그의 이빨은 거의 빠져 있었고, 코는 차가운 북풍에 의해 문드러져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시구를 생각하고, 이를 친구들에게 낭송하곤 하였다. 시들은 그때까지 종이에 기록해두지 못했다. 감옥 생활 동안 종이와 펜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글을 쓸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적 자식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동면하고 있었던 것일까?

 

3.

로젠크란츠가 서방 세계로 피신한 것은 1961년, 그의 나이 57세 되던 해였다. 루마니아의 안기부 직원을 따돌리고 마치 터질 것 같은 가슴의 설렘으로 국경을 넘는다. 그 후에 로젠크란츠는 서독에 정착한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독일 여성을 만나 뒤늦게 결혼하여 슈바르츠발트 근처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에게는 작품 발표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대학 문턱에도 가지 않은 나이든 외국인을 거들떠보는 평론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 듯이, 작가는 작품 발표를 통해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는가?

 

로젠크란츠는 문학적 명성을 누리고 싶지는 않았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나이에 그것은 사치나 다름이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작가가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집필과 사색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세인의 관심을 끈다는 자체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다만 발표를 통해서 더욱 자극을 받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못내 안타까웠을 뿐이다. 동향 시인으로서 파울 첼란을 잘 알지만, 나이 어린 그에게 원고를 내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로젠크란츠의 부인은 사진작가로 일했는데, 1962년에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 - 1962)의 초청을 받는다. 그미는 스위스의 실스 마리아에서 헤르만 헤세 부부를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 1903 - 1969) 그리고 지휘자, 게오르크 솔티 (G. Solti, 1912 - 1997) 등과 상면할 수 있었다. 이때 그미는 아도르노에게 남편의 시작품을 거론하면서, 제발 출판을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이때 건네준 시편들 가운데 「피의 푸가」라는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은 40년대에 쓰인 미발표 작품이었다.

 

어떠한 고난의 눈송이도

시체마냥 그렇게 가볍지 않으리.

어떠한 난로도 내 민족

그대의 죽음처럼 뜨겁지 않으리.

 

화염보다도 더 뜨겁게 날아

눈보다도 더 창백하게 흩어져

오 고통 담긴 구름이여

지상 높이 서성대는 내 민족

 

결코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리.

어디서 무릎 꿇을 수 있을까

그대의 무덤은 공중에서

도망치는 구름 속에 있으니까.

 

(So leichenweiß/ war kein Schnee wie die Not/ kein Ofen so heiß/ mein Volk wie dein Tod // Flogst heißer als Brand/ stobst bleicher als Schnee/ o Wolke von Weh/ mein Volk überm Land // Kamst nimmer herab/ wo soll ich hinknien/ ist oben dein Grab/ in den Wolken die fliehen.)

 

시인은 상기한 시에서 민족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통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애통해 한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공중에서 도망치는 구름 속에” 있지 않는가? 그러니 시인으로서는 고난의 눈송이를 보고 그냥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눈송이와 난로라는 시어는 우리에게 더욱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구들은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