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요. 폭정과 독재의 치하에서는 바른 말과 올바른 글이 오히려 작가에게 위험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발등을 찍기 위해서 창작에 임하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술적 창조물은 때로는 당사자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시 한 편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일까요? 실제로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오시프 만델스탐 (Ossip Mandelstam, 1891 - 1938))이 바로 그 시인입니다.
오시프 만델스탐은 유대인 피혁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시적 재능을 드러내었습니다. 16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여행하여, 소르본 대학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정도로 조숙해 있었습니다. 만델스탐은 1920년대에 시작품을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아크메이즘이라는 예술 사조에 혁혁하게 기여했습니다. “아크메άκμή”는 그리스어에 의하면 “발전의 정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아크메이즘은 상징주의 그리고 쉬르리얼리즘의 발전의 결과 내지 발전의 정점이라는 함의를 지닙니다. 요약하건대 이 사조는 상징주의와 쉬르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한 최정점의 예술사조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예컨대 아크메이즘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강조합니다.
1913년에 그의 시집 『암석Камень』이 간행되었습니다. 암석은 사물의 근원을 지칭하는 물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작품집에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 시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만델스탐의 시가 소련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데에는 동료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의 도움이 컸습니다. 1930년대에 만델스탐은 스탈린 정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탄압을 당했는데, 당시 생계를 위해서 영국, 프랑스 소설을 번역하였습니다. 1933년 가을에 부하린의 도움으로 그는 잠시 아르메니아로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머물면서 집필한 『아르메니아 여행 시편』은 1934년 잡지 “스베스다”에 발표되었습니다. 시편 가운데 하나가 「살아있는 우리는 더 이상 땅을 디디지 못한다.」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더 이상 땅을 디디지 못한다.
아무도 우리의 열 걸음을 듣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이 말을 듣고 있는 바로 그곳 -
요새에 사는 산골 사람 역시 청취하고 있다.
그의 손가락들은 마치 버러지처럼 두텁고 기름지다.
그가 발설하는 말의 무게는 백 파운드이다.
면도로 뜯긴 그의 콧수염 아래 미소 번지고
장화의 목 부분은 숭고하게 번쩍거린다.
Мы живем, под собою не чуя страны,/ Наши речи за десять шагов не слышны,/ А где хватит на полразговорца,/ Там припомнят кремлёвского горца./ Его толстые пальцы, как черви, жирны,/ А слова, как пудовые гири, верны,/ Тараканьи смеются усища,/ И сияют его голенища.
여기서 언급되는 두 단어가 누구를 지칭하는가를 유추해내면, 독자는 작품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민족이며, “그”는 소련의 독재자를 가리킵니다. 흔히 사람들은 600만의 유대인들이 나치 치하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동구에서 자행된 대학살은 그보다 더 폭넓고 끔찍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대학살을 뜻하는 단어인 “Pogrom”은 그 어원이 러시아입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희생되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은 동유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서구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유대인의 관습을 고수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들의 생활방식은 하시디즘 전통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1917년 소련 혁명이 완수되었을 때 레닌은 유대인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레닌의 선조 가운데 유대인이 있었으며, 혁명의 과업을 진척시키는 동안에도 유대인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한 뒤부터 사정은 달라집니다. 국제 노동자 연맹을 추구하는 정책은 스탈린에 의해서 단일 인종의 국가주의의 정책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 가운데에는 레오 트로츠키 (브론슈타인)도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멕시코로 자객을 보내서 그를 처형시켰습니다. 1930년대부터 유대인들은 소련의 단일 민족의 번영에 해가 되는 인간군으로 취급되어 핍박당하기 시작합니다.
만델스탐은 자신의 동족이 스탈린의 정책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박해당하는 경우를 지속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이상 땅을 디디지 못한다.”는 구절이 바로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러한 시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민족은 힘들게 생활하는데, 유대인의 고난과 갈망 그리고 해원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열 걸음” 발자국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가난과 방랑 그리고 박해 장면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요새에 사는 산골 사람”, 바로 스탈린입니다. 그의 손가락은 두텁고 기름집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발언은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가늘게 벗은 지도자 자식들이 곁에 있고
허리 굽히는 노예들과 뒤섞여 유희한다.
휘파람 소리, 야옹 소리, 혹은 비참한 외침에
그 혼자 망치 두드리며 박자 맞춘다.
온갖 명령들은 몸속으로, 이마 아래로, 눈 안으로
무덤 안으로 안장 박는 소리와 겹치고
죽은 자들은 그에게 산딸기 맛과 같다.
오세트 민족의 가슴이 팽창해진다.
А вокруг него сброд тонкошеих вождей/ Он играет услугами полулюдей./ Кто свистит, кто мяучит, кто хнычет,/ Он один лишь бабачит и тычет,/ Как подкову, кует за указом указ —/ Кому в пах, кому в лоб, кому в бровь, кому в глаз./ Что ни казнь у него — то малина/ И широкая грудь осетина.
두 번째 연에서 스탈린의 횡포는 더욱 신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스탈린 주위에는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련의 권력자는 “허리 굽히는” 간신모리배와 사석에서 희희낙락거리며, 보드카를 즐깁니다.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냥개를 부르는 소리, 앙탈하는 고양이 소리 그리고 고문과 폭력에 터져나오는 “비참한 외침”밖에 없습니다. 스탈린의 명령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권력자는 자신의 행동을 기껏해야 말발굽에 안장 박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에게 산딸기 맛과 같다.” 마치 달콤한 산딸기를 즐기듯이, 스탈린은 민초들의 피의 맛을 음미하며 살아갑니다.
시인은 독재자의 이러한 짓거리를 통렬하게 비판하기 위해서 “오세트 민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오세트 민족은 남부 러시아, 즉 캅카스 지방, 특히 블라디캅카스라는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러시아인이면서, 러시아인들 주변에 살고 있는 민족을 거론함으로써 광활한 러시아가 결코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 규합될 수 없으며,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오세트 민족에 속하는 과거의 스키타이 사람들은 근면하고, 예의바르며, 공동체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인을 공경할 줄 알고, 누구보다도 여성들을 존중하면서 살았습니다. 마치 트라키아 지역 출신인 노예, 스파르타쿠스Spartacus가 모권의 정신을 중시하였던 것처럼, 오세트 민족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녀 공히 똑같은 의복을 입곤 하였습니다. 요약하건대 오세트 민족은 시인 만델스탐이 갈구하던 러시아의 이상적 삶의 방식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만델스탐의 시는 소련의 문화부 관리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합니다. 시인은 여러 번에 걸쳐 투옥과 석방을 겪다가, 1938년 5월 2일에 당국으로부터 체포당합니다. 그후 그는 반동분자로 회부되어 블라디보스톡 근처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27일 만델스탐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굶주림과 심장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서 죽기 직전에 침대에서 떨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매서운 겨울밤에 얇은 옷 하나를 걸치고 환각 상태에서 숲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인 작가 나데스타 만델스탐 (1899 - 1980)은 나중에 시인의 원고를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는데, 그의 문학적 명성은 1960년에 이르러 비로소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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