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64

박설호: (4) '아직 아님'의 변증법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아직 아님”은 갈망의 심리학, 즉 종결되지 않는, 기도하는 갈구 행위로 이해된다. 블로흐는 역사와 관련하여 “초험성Transzendenz”이라는 개념 대신에 “바깥 영역Exterritorialität”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역사 자체와 비교될 수 있는 공간 개념으로서, “역사적 과정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Bloch, TE: 373). 이미 언급했듯이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은 갈구하는 의식을 심화시켜서, 어떤 소외 없는 삶의 길을 새롭게 찾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가득 채워 줍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을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성취는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룩될 수 없으며, 오..

27 Bloch 저술 2024.06.29

볼프 비어만: Deutsches Miserere (das Bloch -Lied)

https://www.youtube.com/watch?v=xeuOGI5TrqU 독일의 미제레레. 블로흐 노래    여기서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저기서는 앞으로 벌렁 넘어지고 그리고 나는 이리로 왔지 아, 왔구나 왔어, 이곳으로 비오는 곳에서 똥 더미로 향해  1.독일로부터 독일로 향해망명해 왔을 때내게 달라진 것은 거의없었어, 아! 나 자신의 육체를잔인하게 실험하다니,자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강요에 의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2.독일 주위에 사는 자들은아마도 운 좋은 인민들이야!거대한 독일은 파괴되고두 동강난 채 으르렁거리고 있어두 명의 못생긴 영웅들은서로 대치하고 있으니작은 자는 계속 분란을 일으키고큰 자는 조금도 참지 않아  3.동쪽에서는 작은 빵 한 개가5 페니히, 여기선 20 페니히저기선 맥주가 큰 ..

(명시 소개) 김해화의 시, '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김해화 어린 동자승을 산 속 암자에 두고 스님이 양식을 구하려 내려왔다가큰 눈에 길이 막혀 올라가지 못했답니다.눈이 녹아 길이 열린 뒤에 서둘러 올라가보니스님을 기다리던 모습 그대로 동자승은 죽어 있더랍니다.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슬픈 동자꽃 - 큰 눈처럼 갑자기 물려와서 길을 막아버린 IMF길은 열렸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비는 공사장을 떠돌고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 세상 밖으로 날아갔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꽃 한 송이도 남지 않은 우리 세상오늘은 그냥 비나 내립니다. ............ 실린 곳: 김해화 시집, "꽃 편지", 삶이 보이는 창 2005, 118쪽.  동자꽃

19 한국 문학 2024.06.28

서로박: (5)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앞에서 계속됩니다.) 뒤이어 돈키호테의 이야기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새롭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인공이 몬테시노의 동굴에서 겪은 내용입니다. 돈키호테는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는데, 그만 동굴 속에서 잠이 들어버립니다. 사람들이 그를 구출했을 때, 돈키호테는 수많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는 주인공의 모든 행적이 실제 삶에서의 체험만은 아니고, 나아가 상상력에 의해서 작위적으로 직조된 것이라는 점을 유추하게 합니다. (제 2권 22 – 23장) 이어지는 장에서 누군가 돈키호테를 인형극장으로 안내합니다. 돈키호테는 인형극에 등장하는 기사들을 실제의 적으로 간주하고, 달려듭니다. 이로 인하여 인형극 공연은 완전히 중지되고 맙니다. ..

34 이탈스파냐 2024.06.28

(명시 소개) 김해화의 시, '내가 얼마나 당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알아요?'

내가 얼마나 당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알아요?김해화 고개를 들어봤더니 큰 나무 한 그루가 온통 하얀 꽃송이를 달고젖은 눈으로 내려다봅니다."얼마나 내가 당신 이름을 불렀는지 알아요?"원망이 가득한 눈빛입니다."이렇게 몸을 던져 불러야 대답을 하는 건가요?"그래요, 작은 풀꽃들에 눈높이를 맞추다보면키가 큰 나무들은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내 삶도 그와 같아서좀 높은 계층 사람들은 편치 않아 그냥 지나쳐버리고는 합니다. ............ 실린 곳: 김해화의 "꽃편지, 삶이 보이는 창  2005, 160쪽. 쪽동백나무

19 한국 문학 2024.06.28

박설호: (3) '아직 아님'의 변증법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가능성, 추구, 부정성, 시간성으로서의 “아님”: “아님”은 어떤 무엇을, 혹은 일부의 내용을 객관화시켜 이를 전달 가능한 것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존재의 그릇으로서의 “아님”은 스스로 변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과정은 다분히 지속적입니다. 왜냐면 “아님” 자체가 시간적 공간적 과정에 머물며, 스스로 그러한 과정을 설정하거나, 어떤 내용을 자신에게 실험적으로 집어넣기 때문입니다. (김진 1: 121). 블로흐는 연속적으로 새롭게 설정되는 창조를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보존으로 해명하지는 않습니다. 창조는 오히려 변모하는 의미로서의 보존이며, 나아가 사실적 핵심 내용에 대한 실험입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정착하는 “아님”이라는 행위는 역사적으로 어떤 탁월한 ..

27 Bloch 저술 2024.06.27

서로박: (4)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앞에서 계속됩니다.) 친애하는 C, 튼실하고 멋진 여왕벌에는 언제나 수많은 수벌들이 모이듯이, 탁월한 명작을 집필한 작가 주변에는 요상한, 혹은 훌륭한 모방 작가들이 들끓기 마련입니다. 가령 괴테가 파우스트 제 1부를 일차적으로 완성한 시점은 1797년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괴테는 작품을 끊임없이 개작하였습니다. 그후 35년 후에 파우스트 제 2부가 완성되었으니 필생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세기 초에 어느 젊은이가 자신이 파우스트 제 2부를 집필했다고 말하면서, 원고를 들고 괴테를 찾아왔습니다. 이때 괴테는 몹시 분개하면서, 이 세상에 파우스트를 완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있다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라고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괴테는 훌륭한 작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인간으로서..

34 이탈스파냐 2024.06.27

(명시 소개)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피는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한번 처다볼 틈없이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내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   시는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사고는 무척 깊습니다.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한번 처다볼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처음에는 화무십일홍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유한성은 이 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합니다. 청춘의 열정과 갈망은 참으로 크고 강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열정과 갈망을 청춘의 내부에서 그리고 청춘의 외부에서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청춘의 열정과 갈망은 주..

19 한국 문학 2024.06.27

박설호: (2) 갈망의 힘.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흔적들』의 글들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흔적이라는 단어는 자구적으로는 발자국, 바퀴 자국 등으로 이해되며, 단서 내지는 암호 등의 의미를 지닌다. 주어진 현실 속에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흔적이 마치 어떤 놀라운 비밀처럼 숨어 있다. 블로흐는 에드거 알란 포, 코난 도일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이러한 암호를 세심하게 주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블로흐의 짤막한 글이 드러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인간과 세계에 도사린 변화의 효모 그리고 갈망의 방어기제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적들』이 블로흐의 희망 철학 사상을 압축한 미세화인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역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블로흐의 글들은 블로흐 ..

28 Bloch 흔적들 202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