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20

박설호의 시, '기젤라 만나다'

기젤라 만나다 박설호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어두움이 섞여 연파랑 눈이 내리는 뮌헨의 사월 어린이 놀이터 기젤라 너는 나에게 말 걸었다 같은 나라네요 저도 그래요 노랗다고 하는 피부 까만 단발머리 가느다란 실눈 위엔 다래끼 하나 소녀답지 않게 너는 애잔히 말했다 세 살 때 왔어요 홀트를 통해서요 너는 모르리라 대구의 어느 여공(女工) 피눈물 흘리며 남의 눈을 피해 핏덩이 버리고 달아나야 했음을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요 기젤라 나의 딸 21세기가 되면 비둘기처럼 날아가리 피를 못 속이는 우리의 만남 십분 간 외국에서 ............. 1983년 뮌헨 슈바빙에서 완성한 미발표 작품이다.

20 나의 시 2023.11.15

박설호의 시, '헤로의 램프'

헤로의 램프 박설호 저녁 무렵이면 으레 버릇처럼 내 집 처마 위에 램프를 켜두곤 해요 그러면 별빛 희미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방향을 잡을 수 있어요 모래 위로 걸어 나와 물기를 터는 당신은 이곳의 풀 냄새 그 향기에 취하지요 나의 섬에서 함께 사는 꽃과 새들에 당신은 뻐꾸기 울음소리에 그만 시간관념을 잃지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그리 애지중지 여기는 당신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당신에게 재화도 결혼도 미래도 요구할 수 없지만 그저 부담 없이 나를 통해 행복하세요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여기에는 이상하게 바라보는 자 없거든요 한 시간 혹은 두 밤이라도 개의치 않아요 언제나 조언을 구하는군요 난 당신의 마음 조각을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전할 말은 단 한 가지 최상이라고 판단하는 걸 그냥 행하라고 이제 떠날 ..

20 나의 시 2023.11.05

박설호의 시: 임의 반가사유 1

임의 반가사유 1 박설호 십 년 자고 일어나니 창밖에는 눈포단 소복 걸친 임은 나를 안아줄까 돌아설까 "네 곁에 잠자는데도 이름마저 잊었니?" 반가 사유는 보조의자에 걸터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반가 사유는 골똘히 무언가를 떠올리는 혜윰입니다. 이에 비해 반가사유상은 모습입니다. 흔히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보살의 상을 지칭합니다. 사람들은 대자대비( 大慈大悲) 의 마음을 불상에 담아 그것을 표현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 」 역시 반가사유의 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국가의 후원으로 단테 알리기리의 『신곡 Divina Commedia 』에 나오는 지옥문을 조각품으로 완성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술..

20 나의 시 2023.10.03

박설호의 시, "브레멘"

브레멘 박설호 가을 저녁 강가에는 오리 떼 그루잠 자고 떡갈나무 가지의 상고대 다가오는 추위에도 흐물흐물 녹는 디도의 흐느끼는 눈물이라면 * 저 멀리 계신 부모님 정화수가 보이지 베저 강 둥거 호수 ** 얼음 사이 덧물이 흘러 새띠기들 갈 길 바쁜 행려자의 소매를 잡고 친구로 괴자고 다소곳이 애원하고 있을 때 푸드득 갈까마귀도 푸접 떨고 있었지 브레멘 광장에서 올려다 본 당나귀 황구 고양이 수탉 모두 힘없는 늙은이 모임 *** 약한 자의 저항 어떠한 힘인지 보여준다면 화음은 길손의 마음 벅차게 만들었지 바로 여기 반거충이 잠시만 머물지만 데이지 꽃 그 향기 가슴속 깊이 사랑하기에 함께 아우르자는 디도의 말없는 고백이라면 순간의 설렘 속에서 기쁨은 영원했지 * 디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카르타고..

20 나의 시 2023.04.02

박설호: 엑스테른슈타이네 3

엑스테른슈타이네 3 박설호 “아침에는 네 발로, 대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움직이는 피조물은 무언가?“ 기암절벽은 행인에게 물었다 * “인간이야.” 어릴 때는 네 발로 엉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늙어서는 지팡이로 걸으니 섟에 이끌려 좌충우돌 한평생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비밀의 수수께끼를 가리킨다. 스핑크스는 행인에게 질문을 던져서 대답하지 못하는 자들을 죽인 다음에 심연에 빠뜨렸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 사람들을 구원하였다고 한다..

20 나의 시 2022.04.14

박설호의 시 "엑스테른슈타이네 2"

엑스테른슈타이네 2 박설호 두남받고 싶어서 이곳으로 향했니 안녕 나는 이곳의 업구렁이 까치 요정이에요 여기서 오랜 세월 당신을 기다려 왔어요 나의 오빠 거인은 여기에 이빨 네 개 박아두고 떠나갔어요 그건 츠렁바위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살아갈 거소랍니다 중앙 동굴에 거실 차리고 원구 동굴에 신방 꾸려요 옆 동굴에서 당신의 아기 키울 게요 그러니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아요 내가 봉죽드는 동안 당신은 리라 켜면서 노래하세요 떠난다는 말씀만은 말아주세요 안녕 나는 이곳의 업구렁이 까치 요정이에요 슬퍼라 언젠가 나는 흙먼지가 될 텐데

20 나의 시 2022.04.09

박설호의 시 "엑스테른슈타이네 1"

엑스테른슈타이네 1 * 박설호 유로파의 숲속에서 비긋는 나 날탕이지 기암절벽 구경하는 봄맞이 숲과 나무 대평원 불끈 솟은 힘 돌아보다 돌 되었지 눈감으면 그 장소는 미래의 나의 신방 꽃잠 동굴 한 요정 감실감실 안기는데 거인아 무얼 관음하다 이빨까지 뽑혔니 ................................. * 엑스테른슈타이네: 독일의 도시, 호른 바트 마인부르크에 있는 기이한 암석들을 가리킨다. 흔히 “까치의 바위 rupis picarum”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타이탄이 아름다운 요정을 바라보다가 실수로 인해 자신의 이빨을 땅에 박아놓았다고 한다.

20 나의 시 2022.03.30

박설호의 시 "법원과 검찰청이 폭파되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

법원과 검찰청이 폭파되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 박설호 1. 바다에서 그물 던지면 작은 고기 모두 빠져나가고 월척들 포획되지만 육지에서 그물 던지면 잡히는 건 기껏해야 송사리들 큰 놈들 잘도 빠지지 2. 망치야 제발 공구 통 속으로 들어가 컴퍼스와 함께 살아라 언젠가는 바깥으로 나와 삶을 망치는 대신 사람을 축조할 테니까 프리메이슨 ........................ (사족의 말씀) 주지하다시피 인류 최초의 법은 로마법이다. 그런데 로마법이 어떠한 계기로 탄생했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가 언급한 로마 법의 목표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다음의 사실을 이어나가기 위한 허사, 다시 말해 추상적 발언에 불과하다. 즉 로마 법은 채..

20 나의 시 2022.03.09

박설호의 시, "반도여 너와"

반도여 너와 박설호 공부가 밥줄인 듯 술 담배를 끊고 남의 책 동초서초하며 보내는 서러운 시간들 어느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처럼 일일이식주의자가 된 나는 도둑의 설렘으로 직업소개소를 기웃거리고 괜히 태어났다며 머나먼 땅 이곳까지 와서 공부만 하는 게 부끄럽다며 세상에 무임승차한 죄의식 떨치려고 “뮌헨의 자유” 역에서 * 며칠 후에 탄생할 내 아기 생각한다 ............................ (1983년에 집필된 나의 미발표 작품입니다) 뮌헨의 지하철 역 "뮌헨의 자유"이다. 옛날에는 감청색이 칠해지지 않았는데, 새롭게 리모델링된 것처럼 보인다. 8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80년대 후반부에 한국은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20 나의 시 2022.02.17

박설호의 시,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교육은 채찍이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WVBAnTc_i4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혹은 교육은 채찍이 아니다 - 부산동고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자네는 말했지 음악은 기억이라고 이전 사실의 몇몇 장면 떠올리게 하니 자네의 발라드 노래는 과거로 향하는 여행이야 키 작고 말이 없던 자네 가슴속 숨겨져 있던 기예의 불꽃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지 당시의 학교 폭력은 오직 선생의 것 교련 선생은 왕이었지 달콤한 평화와 자유는 나태함을 부추기곤 한다고 고함지르던 그는 너희를 구타하는 재미로 살고 동료를 병역 미비로 직장에서 내쫓기도 했지 공공연히 희롱당해도 두려움에 떨던 동료 여선생님 그의 짓거리에 아무런 저항 없이 노여움의 껌만 씹던 나는 겁 많은 생쥐 한 마리 초록 버스 운전석에 부착된 글귀..

20 나의 시 202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