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20

박설호의 시 '상처 입은 장비로구나'

상처 입은 장비로구나박설호 가랑비 무시로 내리다 등에 아기 업은 채 삼지창을 높이 들고 이자 강을 터벅터벅 건너다 뒤에는 아내가 옷고름 풀어헤친 채 병아리 걸음으로 올망졸망 걷다 앞에는 백인 무사들 낯설게 보이는 우리에게 독침 날리다 행여나 갓 태어난 아들이 다칠까 두 팔 허우적거리며 방어하지만 비틀거리며 미소 흘리는 아내가 다치면 어이 할꼬 영국 공원 그늘 아래 잠시 휴식 취하며 공자의 쪽지를 꺼내어 정독하다 “안회야, 네가 자랑스럽구나. 하찮은 음식, 더러운 골목에 살지만, 너는 배움에 항상 행복해하는구나.”* 불현듯 안회가 꿈에 나타나 나를 꾸짖다 어리석은 짓거리 답습하지 말라고 이제 절반 달려왔는데 노잣돈과 식솔들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당장 되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눈안개 가득 피어 있..

20 나의 시 2024.05.02

박설호의 시 '사랑의 요가'

사랑의 요가- 생태공동체 ZEGG에서 * 박설호  살며시 눈 감아보세요어둠 속에서 옷 벗고 누우세요주위는 깜깜해요 여기에 당신은 존재하지 않아요팔 다리에 힘을 빼세요 반 눈을 떠 보세요어둠 속에서 모든 생각 내려놓으세요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요 우리는 한 몸이지요호흡과 맥박 느껴보세요 졸음에서 벗어나세요카루네쉬 음악을 들려드릴게요 **바깥의 걱정과 부담스러움 온새미로 잊으세요일어나 사지를 펴세요 다시 눈 감아보세요살갗에 알로에 기름 발라볼게요미끌미끌 내 몸을 타인의 것처럼 만져보세요바닐라 향을 즐겨보세요 ........................ * ZEGG은 베를린 근교에 있는 생태공동체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재화가 공동으로 분배된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없고, 성인 남녀들은 자물쇠 없는 방에서 각자 거..

20 나의 시 2024.05.01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발문) 한반도와 유로파, 이별 그리고 만남  거의 반세기 동안 시를 써왔지만,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수없이 신춘문예에 낙방했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학문에 몰입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동안 연구 논문이 필자의 든든한 아들이었다면, 시작품은 그야말로 예쁘고 귀한 딸이었다. 체질적으로 근엄한 가부장과는 거리가 먼 에코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어리석게도 언제나 아들만 세상에 내보내고, 딸을 서랍 속에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외국어 번역 시집을 해외에서 간행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판단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의 딸들은 갑갑한 공간에서 얼마나 자주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을까? 뒤늦게 과년한 딸들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서 처음으로 예식장..

20 나의 시 2024.04.30

박설호의 시, '임의 반가사유 2'

임의 반가사유 2 박설호 도근도근 설렘이 가슴 가득 채우면 스님과 사미는 어디론가 출가한다 밤새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있다 강변에는 소복을 입은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 사미가 머뭇거릴 때 스님은 여인을 업으면서 강을 건넌다 여인이 고맙다고 말할 때 스님은 합장한 다음에 사미와 길을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미가 말한다 여인을 등에 업다니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스님은 대답한다 난 시나브로 잊었는데 너는 아직 마음속에 여인을 품고 있구나 사미가 얼굴을 붉힐 때 스님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는다 * 일순간 그 열기 게눈 감추듯이 숨는다 ................. * 이 에피소드는 당 헌종 때 단하천연 (丹霞天然, 739 – 824) 선사, 혹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하라탄산 (原坦山..

20 나의 시 2024.04.11

박설호의 시, '뮌헨을 떠나며'

뮌헨을 떠나며박설호- “나는 이제 너희를 떠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Oskar Panizza) * - 잘 있어 뮌헨이여차갑게 보이는 높새바람빙하기에도 침식하지 않을삼각 집 겨울 내내 쌓인눈이여 안녕 잘 있어 베네딕트너무나 맑지기 때문에믿음이 흐릿한 성당구름에 가려 그림자 잃은하늘이여 안녕 잘 있어 법(法)이여죄 저지르면돈으로 보상하면 그만지폐 들고 파출소 옆에서 갈긴소피여 안녕 잘 있어 너무 호듯한푸른 눈의 노랑머리 여자여그대는 겉만 눈부실 뿐안아도 안아도 정(情)을 모르는서러움이여 안녕 잘 있어 시간이여언제 떠날 텐가 하고다그치며 유예된 일 년을비자 속에 가두어버리던관청이여 안녕 잘 있어 나의 복마전내가 설 땅은 어디인가새내기 배움터 방 구하려고수요일마다 뒤적거렸던신문 광고여 안녕 잘..

20 나의 시 2024.03.07

박설호의 시, '청설모'

청설모박설호- “여자들은 늘 쫓기는 꿈을 꿉니다.” (김혜순) 수컷인데도 늘 쫓기는 꿈을 꿉니다 꿈이었어요 저녁 거미가 내리자 버스를 타고 그미에게 향했습니다 도토리를 선물하고 싶었지요 버스는 그미가 사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어리둥절했지요 푸른 눈의 다람쥐들이 검붉은 내 얼굴을 노려보았어요 황급히 에버스베르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거기서 지하철 노선을 읽었습니다. * 괴상한 외국어라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다행히 “대학교” 역이 눈에 띄었지요 ** 아니 기말시험을 까마득히 잊고 돌아다니다니 일순간 나 자신이 미워졌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속삭임을 가을귀로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코맹맹이 음성이었지요 예야 마음 편하게 먹으렴 아 어머니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낯설고 추운 땅에서 나는..

20 나의 시 2024.03.02

박설호의 시 '반도여 안녕 1'

반도여 안녕 1박설호 비행기 타고 반도내려다보면 그제야깨닫게 되리라 소나무숲과 눈물 가득한 무등산넓은 강이 보이고한 많은 철조망이멀어지는 것을 파농처럼 주먹으로 *가슴 치며 끌려간친구 소식에 찢어버린일기장 이런 어리석은 놈비행기 뜰 때까지조심하지 말고 마냥자학이나 해라 십 년 후에 나는평화주의자가 되어귀국 길에 올랐다지가 묵자(墨子)라도 되나아쉬운 눈물 몇 방울맺혀 있는 망명객슬프지 않는데 비행기에서 강산내려다보면 시간은거꾸로 흐르고 소나무숲과 눈물 말라가는 무등산넓은 강이 보이고다시 그 철조망들이눈에 들어왔다 **  ......................... * 프란츠 파농 (1925 - 1961): 카리브해 출신의 프랑스 심리학자, 철학자. 신식민주의를 비판하였다.** “저 밝게 빛나는 하늘에 올..

20 나의 시 2024.02.21

박설호의 시, '반도여 안녕 4'

반도여 안녕 4박설호 - 로마의 아우렐리우스는 보헤미아 지방의 마르코를 점령하려 했을 때, 사자를 이용하였다. 힘이 센 마르코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기이한 맹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들 나라는 혼신으로 “로마 산 털 복숭이”들과 피 흘리며 싸우다 몰락하였다. - 천하무적 역도산이어떻게 죽었는지 아니칼을 들고 덤비는골목 불량배에게 넓은배 내밀면서 그는 “어디마음대로 찔러라.”하고일갈하였어 칼침에그가 목숨 잃었다면그건 오산이야 부상 후그는 치료받을 수 없었어단단한 근육 사이로주사 바늘 꽂히지 않아쇠 독 번지고 말았지 * “한 나라에 무기가많이 비축되면그럴수록 안전하다.”고믿는 너희 도시인들이여“충청도 어느 마을에제주도 모슬포에핵무기 설치되면그럴수록 든든하다.”고믿는 너희 시골사람들이여일손 멈춘 채단 오 분..

20 나의 시 2024.02.02

박설호의 시, '윤이상'

윤이상박설호 내 다시 겪을 수 있으랴통영여고 음악실에서서툴게 바이올린 껴안던보조개 그미의 하얀 블라우스검은 치마 가까이서 숨죽이던동백꽃의 향기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비진도 숲속의 현호색평생 함께 살자 하던고백의 순간 봄의 두근거리던욕망을 그림자로 가려주던팔손이 나뭇잎을 내 온통 삭일 수 있으랴통영 갓집 돌담 아래조개구이 냄새 풍기던 저녁처녀 귀신 그림자 학도병의눈물처럼 물결 튕기던 파도해외 유학의 꿈을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 尹伊桑 , 1917 - 1995) 의 교향곡 모음집  다음을 클릭하면 윤이상에 관한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r9EEnHGaTIs

20 나의 시 2024.01.07

박설호의 시, '취리히에서'

취리히에서박설호  유학이 싫다면서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농촌으로 돌아간 형아우습게도 나는 이곳알프스의 끝 간 데에 서서가을장마 물꼬 터줄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까까머리들 가르치다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막일이 무언지 모르는사람다운 이곳 사람들결코 거꾸로 돌지 않는롤렉스 시계를 수리하거나침 발라 돈이나 세며주말이면 호수 가에서뱀처럼 마구 허물 벗으며꼬물꼬물 사타구니를일광욕시킨다 새 소리에 익숙하여그들의 귀는 듣지 못한다타국에서 일어나는피 맺힌 아우성을국경 건너온 거액 탓일까당신은 알고 계시리라힘 앗긴 나라의 세금안전한 이곳의 금고 속에서먼지 묻은 눈물 흘리고 중립적인 이곳 사람들가난을 쳐다보기 싫어오래전에는 유대인들을최근에는 쿠르드족 쫓아내고보이지 않는 힘 무섭다고가끔 광장에 모여뭐가 그리 두렵고 답답한지아름..

20 나의 시 202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