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521) 한강 작가와 노벨 문학상

필자 (匹子) 2024. 10. 11. 08:55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탁월한 한국 작가의 작품들이 문을 두드렸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한국 여성이, 그리고 핍박 받은 땅, 광주 출신의 소설가가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수탈과 오욕의 광주, 그 피묻은 땅에서 자라난 영혼이 저항의 글쓰기로 승리를 구가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고도 멋지지 않는가?  가까이는 어머니의 희생, 여자라는 이유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내 누이의 삶 그리고 멀리서는 역사 속 한국 여성들의 수모 그리고 남편과 나라를 위한 내조와 헌신 등이 뇌리를 스친다. 노벨상 수상작 "흰"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작품 제목이 백의 민족 여성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우연일까?  

 

노벨 문학상의 선정 기준은 작품의 우수성만은 아닌 것 같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중일의 가부장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작가를 중시한 듯 하다. 이는 세계적 추세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폭력과 수탈 그리고 전쟁을 일삼아온 백인 남성과 반대되는 동양인 여성 작가가 물망에 올랐을 것이다. 자고로 문학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특히 수준작이 즐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한강 작가가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한 이유의 발언 역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잔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데, 무슨 잔치 타령인가?"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올곧은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문학이 세계를 직접 변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작가의 자세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한국에 훌륭한 문학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이다. 한용운, 박경리,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그리고 조세희 등이 작품들이 떠오른다. 한강 작가 역시 한국 문학의 자양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이는 감사할 일이다. 훌륭한 한국 문학의 작품들이 최근에야 활발히 해외에 소개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해외 번역가들이 이전에는  한국 문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제 아무리 외국어에 능통해도 네이티브 스피커 없이 혼자서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다문화 가정에서 두 개의 모국어를 습득한 자제들은 먼훗날 이러한 편견을 깨뜨릴지 모른다. 

 

문학은 살아있다. 앞으로도 문학의 영향력과 힘이 강건하게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흔히 사람들은 AI 기술에 맹신하고, 돈 많은 CEO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문화 예술의 자생적 발전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Vita brevis ars longa est. 그렇기에 대부분 예술가는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돈과 권력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이름 없는 시인, 화구(畵具)를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무명 화가 그리고 끼니를 거를 정도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음악가들을 진정으로 애호하고, 지지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가능성 그리고 갈망을 촉진하는 매개체다. 예술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암울하고 황량할까? 그렇기에 지금부터 부지런히 주위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을 구독해서 읽고, 무명 화가의 그림을 애호하도록 하자. 인디 음악을 즐겨 들으며, 이름 없는 음악인들을 애호하고, 혜화동의 연극 팀에서 보수 없이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들을 지지하고 격려해주자. 노벨상 수상보다도더 소중한 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정의로움과 거짓 없음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나의 문화란 특정 지역의 예술가의 몫이고, 문화의 발전은 이들에 대한 물질적 심리적 지원으로 자라난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이탈리아 예술은 메디치 가문 그리고 일반 주위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찬란하게 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