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65

서로박: (4)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들 첫째로 주인공, 한스 브론슈타인의 심리에는 어떤 미성숙한 “성격갑옷 Charakter- panzer”이 드리워져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자발적으로 드러낼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가령 주인공은 주위 사람들을 만나서 아버지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경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견해를 꺾고,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킬 방도를 찾기 위하여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자위하는 태도 역시 성격 갑옷에 기인한다. 둘째로 주인공은 어떤 뚜렷한 삶의 목표를 지니지 않고 있다. 주인공이 느끼는 지루함과 무감각 Lethargie은 소설의 장마다 반복되어 ..

45 동독문학 2023.05.17

서로박: (3)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5. 부자 사이의 의견 대립 주인공, 한스는 스스로 합리적으로 사고한다고 믿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인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를테면 엘레는 첫 번째 편지에서 동생의 무책임하고도 도피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파시즘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를 몹시 혐오한다.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유대인과 독일 간수 사이에서 그저 중립을 취하는 방관자에 불과하다. 유대인 자녀라는 사실을 밝히면 대학 입학에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끄럽게 여긴다. 다시 말해서 한스는 자신의 잘못이라든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가장 창피하게 생각한다. 주인공의 바로 이러한 태도는 나중에..

45 동독문학 2023.05.17

서로박: (2)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3.『브론슈타인의 자식들』의 내용 지금까지 우리는 베커 소설의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을 약술하였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떤 교훈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갈등의 내적인 구조를 강조함으로써 독자에게 어떤 판단을 유보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의 갈등 구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아버지 아르노와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여자 친구, 마르타와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다. 전자는 유대인포로수용소 간수의 처벌에 관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관계되며, 후자는 남녀 사이의 애정 내지 소통이라는 심리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 두 가지 갈등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증폭된다. 일인칭 소설은 도합 36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소설의 화자는 유대인 2세, 한스 브론슈타인이다. 이..

45 동독문학 2023.05.17

서로박: (1)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1. 들어가는 말 “좋은 곳에 숨어 사는 자는 좋은 삶을 사는 자이다. Bene qui latuit bene vixit.” 이것은 말년의 오비디우스 Ovid가 흑해 망명의 외로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시구이다. 만일 유렉 베커 Jurek Becker의 아버지, 모르데하이 베커 Mordechai Bekker가 이 구절을 접했다면, 시적 아이러니에 아마도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에게 “좋은 곳”이란 이 세상에 없다. 주위에는 자기 민족에게 총을 들이대던 원수들이 일상인이 되어 살고 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독일에서 계속 살지만, 과거의 기억을 떨치고 어느 정도 자기기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렉 베커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폴란드 소년, 예르..

45 동독문학 2023.05.17

서로박: 프리스의 문학세계 (3)

(앞에서 계속됩니다.) 4. 『비행선』(1) 두 번째 작품, 『비행선 Das Luftschiff』은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 Der Weg nach Oobladooh』과는 달리 동서독에서 공히 197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비행선을 소재로 한 작품은 주로 20세기 이후의 유럽 문학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일련의 소설 외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았는데, 프리스가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텍쥐페리의 소설과 프리스의 『비행선』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리라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전자가 모성과 이에 대한 일탈이라는 심층 심리적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면, 후자는 시민주의 사회의 부자유와 이에 대한 일탈 욕구라는 어떤 사회학적이자 정치적인 모티프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소재가 ..

45 동독문학 2023.03.14

서로박: 프리스의 문학세계 (2)

(앞에서 계속됩니다.) 3.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2) 어느 날 아를레크는 에스파냐 출신의 이사벨이라는 처녀를 사귀게 됩니다. “낯선 땅의 낯선 여자는 마치 집시처럼 우울한 표정을 짓지만, 가볍고도 강한 사랑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20쪽) 이사벨은 순간적으로 주인공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핍니다. 그미의 용모, 말씨 그리고 행동 등 모든 것이 자신의 잃어버린 유년의 흔적을 자극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밀하게 지냅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상대방의 몸을 탐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아를레크의 눈에는 이사벨이 처음부터 이상적인 처녀로 비칩니다. 에스파냐 그리고 에스파냐의 언어는 주인공에게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주인공은 이사벨에게 ”..

45 동독문학 2023.03.14

서로박: 프리스의 문학세계 (1)

1. 서언 친애하는 F, 프리스는 폴커 브라운과 함께 동독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작가”에 해당하지만, 기이하게도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소설가이며 번역가입니다. 그는 1935년 에스파냐의 빌바오에서 태어났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부친의 사망 후에 어머니와 함께 구동독의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였습니다. 프리스는 김나지움의 과정을 마친 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영문학, 불문학 그리고 에스파냐 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독문학자, 한스 마이어 그리고 불문학자, 베르너 크라우스들이었습니다. 특히 크라우스는 프리스를 자신의 내제자로 받아들이고, “동독 학술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전수한 바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고전문학 그리고 ..

45 동독문학 2023.03.14

서로박: 폴커 브라운의 미완성의 이야기

1981년 베를린 작가회의에 참석한 브라운 친애하는 R, 당신은 극작가로 대성하고 싶어 합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동독 출신의 가장 다재다능한 작가, 폴커 브라운 (1939- )의 소설 “미완성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이 당신 꿈의 실현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브라운은 70년대의 중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구동독에서 언제나 커다란 토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브라운은 사회 정치적으로 적극적 태도를 취하는 사회주의자로서 “정체된 현재 (Status quo)” 대신에, 사회의 끝없는 변화 과정을 촉구하였습니다. 브라운의 작품에서는 장르의 한계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R, 작가들이 많이 살아가는 나라 K에서는 시인은 시만 쓰고, 소설..

45 동독문학 2022.12.27

서로박: 동독 문학 연구의 필요성과 한계 (2)

5. 대신에 한국 문화 시장을 주름잡게 된 것들은 이른바 프랑스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이론들, 명사적 요소론에 입각한 정태주의의 사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 등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우량 문화가 자생할 힘을 잃게 된 까닭은 한마디로 부실기업 식의 거짓된 문화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상기한 사상과 문화에서 부분적으로 긍정적 요소를 찾아내어, 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들 역시 주어진 현실과 관련하여 조금씩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식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는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은폐시키지는 못한다.) 거짓된 껍질 문화들은 이번에도 동시 다발적으로 동양의..

45 동독문학 2022.06.09

서로박: 동독 문학 연구의 필요성과 한계 (1)

아래의 글은 나의 저서 "떠난 꿈 남은 글" (한마당 1999)의 서문으로 발표된 바 있다.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은 시대정신이 20년 전과 변함이 없다는 것은 반증한다. 1. 고인 물은 으레 썩게 마련이다. 이는 작게는 나 자신에게, 크게는 어떤 특정한 문화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단 거창한 것부터 먼저 언급할까 한다. 원래 문화란 외부적으로 이질적 문화와 뒤섞이지 않거나, 내부적으로 생동하지 않을 때 반드시 정체되어 썩어버린다. 학문이나 문화는 비유적으로 말해 -동일한 우량종자의 씨 내림과는 달리- 가급적이면 잡 교배를 통해서 발전, 수정 그리고 보완된다. (인맥, 학맥 등을 따지는, 이른바 자화자찬 식의 섹트주의 내지는 학문적 근친상간 행위야말로 문화 발전에 대한 악재가 아닐 수 없다.)..

45 동독문학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