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동독 문학 연구의 필요성과 한계 (2)

필자 (匹子) 2022. 6. 9. 11:07

5.

대신에 한국 문화 시장을 주름잡게 된 것들은 이른바 프랑스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이론들, 명사적 요소론에 입각한 정태주의의 사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 등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우량 문화가 자생할 힘을 잃게 된 까닭은 한마디로 부실기업 식의 거짓된 문화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상기한 사상과 문화에서 부분적으로 긍정적 요소를 찾아내어, 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들 역시 주어진 현실과 관련하여 조금씩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식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는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은폐시키지는 못한다.)

 

거짓된 껍질 문화들은 이번에도 동시 다발적으로 동양의 작은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 대신에 모방만을, 생산 대신에 소비만을, 비판 대신에 찬양만을 자유 대신에 굴종만을 요구하지 않는가? 이로써 안타깝게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은 이를테면 인류의 역사 이래로 이어져 온 평등사상이고, 유토피아의 사고이며, 굶주림과 생명 등의 문제와 관련된 진지한 문화적 논의 등일 것이다.

 

그럼에도 “위험이 도사린 곳에 구원은 자라나”는 법이다 (횔덜린). 다시 말해 위기는 우리에게 전환의 여지를 남겨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수직 구조로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거대한 독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지금까지 언제나 중지되었던 개별적 문화 운동이 확장될 수도 있다. 가령 노동 운동, 인권 운동, 남녀평등과 환경 운동 등을 생각해 보라. 모방과 소비와 찬양과 굴종을 강요하는 거짓 문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자생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비판 의식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민초들의 상기한 운동들은 생명력을 이어나갈 것이다.

 

6.

본서의 간행 역시 상기한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동독의 몰락 이후에 동구의 제반 문화는 거의 사장되어 버렸다. 사라진 사회주의 국가의 해변에 늘려 있는 모래는 일견 시류에 오염되어, 지저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금가루가 숨어 있지 않는가? 오염된 해변 가에서 필자는 금가루를 황망히 찾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문화적 변방 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오래 서성거렸다. 마치 봉두난발의 자유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처럼... 그러나 금가루를 찾는 작업은 어떤 보물 지도에 의해 수행되는 게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기다림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재능 없는 필자에게는 더욱 커다란 정신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업의 결과물이 바로 바로 "떠난 꿈, 남은 글. 동독 문학 연구 2"이다. 본서는 "동독 문학 연구. 동독 문화 정책 개관"의 속편인 셈인데, 1989년부터 1998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제각기 씌어졌다. 이 책에 실린 텍스트들 가운데 발표된 것은 그 사이에 약간 수정되었다. 텍스트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씌어졌으므로, 상호 중복 내지는 생략된 부분이 있으리라.

 

7.

본서에서 필자가 망각된 동독 문학 작품을 다루면서, 중점적으로 다룬 테마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유토피아적 사고, 2. 국수주의와 파시즘의 현재성에 관한 문제, 3. 과학 기술 편향주의 및 환경 운동, 4. 자유의 삶과 성생활에 관한 문제, 5. 문화적 전통과 유산에 관한 문제 등. 특히 본서에서 일관된 테마로 다루어지는 것은 첫 번째 사항인데, 본서의 제목 “떠난 꿈, 남은 글” 역시 이와 관련된다. (블로흐에 관한 몇 편의 철학적 텍스트는 -본서의 내용과의 관련성 때문에- 마지막에 수록하기로 하였다.)

 

혹자는 “떠난 꿈”이라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체념적으로 이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꿈”이란 처음부터 떠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엇이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은 꿈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책 제목을 “떠난 꿈, 남은 글”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기존했던 사회주의적 실험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는 사회주의적 이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사회주의적 이상이 처음부터 완벽한 구도 속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의 사회주의에 관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예 미학적인 연구를 그다지 절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8.

본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구동독 시절에서 씌어진 제반 문학 작품은 주어진 특정한 현실적 맥락에 입각하여 세부적으로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제 과거사의 영역으로 이전된 문화는 오늘날의 시각에 의해서 결과론적으로 매도될 수는 없다. 둘째, 동독 문학의 카테고리가 국가 체제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는 게 아쉽지만, 그게 오로지 정치적 관심사 내지 권력 기능과의 관련성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수는 없다. 필자가 여러 텍스트에서 테마를 확장시킨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셋째, (문학 이론, 문학사 그리고 현장 비평을 포함하는) 문학 연구는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작가 및 독자보다 작품을 중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현대 수용 미학의 보편적 입장에 의거하여- 독자의 고유한 기능 및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다른 차원의 문제 때문에 작가 대신 작품을 중시하고 싶다. 가령 작가 중심의 연구는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권위주의적 함정에 빠지게 하거나,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히도록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 대신 사상을 선호해야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사람을 따를 게 아니라,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9.

앞에서 필자는 새로운 문화의 정확한 수용, 우리 문화의 폭과 깊이의 강화 그리고 문화 교류 및 발전 등을 거창하게 피력하였다. 책 한 권 간행하면서 문화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지 모른다. 그러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하지 않는가? (...)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서랍 속에 쌓여 있던 나의 자식들은 수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의 몇몇 출판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내 저작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는 어느 특정한 문화 집단에 예속될 수 없었던 필자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때마다 스스로 반성하고 겸허한 자세로 노력하는 것이 정도 (正道)라고 여겼다

 

(...) 최근에 갑자기 무언가 뇌리에 스쳤다, 운행 중의 자전거는 결코 옆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라고... 그래, 스스로라도 자식들을 출가시키자. 학문적으로, 심리적으로 썩지 않으려면, 달리 방도가 없다. 바로 이 점이 무리하게 출판을 추진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본서의 텍스트들이 부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보물처럼 작용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못난 나의 자식들이 최소한의 문화적 자양으로서, 과감한 비판의 대상으로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출산을 도와주신 여러 산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