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4)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필자 (匹子) 2023. 5. 17. 10:04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들

 

첫째로 주인공, 한스 브론슈타인의 심리에는 어떤 미성숙한 “성격갑옷 Charakter- panzer”이 드리워져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자발적으로 드러낼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가령 주인공은 주위 사람들을 만나서 아버지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경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견해를 꺾고,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킬 방도를 찾기 위하여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자위하는 태도 역시 성격 갑옷에 기인한다.

 

둘째로 주인공은 어떤 뚜렷한 삶의 목표를 지니지 않고 있다. 주인공이 느끼는 지루함과 무감각 Lethargie은 소설의 장마다 반복되어 나타난다. 자고로 권태의 심리는 그 자체 소시민이 드러내는 자기 회피의 표현이며, 대체로 자신의 고유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을 노출하곤 한다. 주인공은 과거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유대 문화와 독일 문화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주인공에게는 어떤 무엇을 과감하게 추진할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불의에 저항하려는 불굴의 의지도 없다. 그는 주위의 반유대주의의 경향에 대해서 내심 분개하지만, 자신이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가령 유대인이기 때문에 동급생들로부터 왕따 당할까 두려운 마음은 가령 제 5장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Bronstein 85: 47f).

 

게다가 주인공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려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에게 합당한 과목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하상 河床이 아니다.” (Bronstein: 15). 물론 인간은 주인공의 말대로 이전 세대의 세계관을 고분고분하게 답습하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와 조상이 겪었던 과거 역사를 외면한다면, 인간은 삶에 주어진 자신의 처지와 정황을 간파할 수 없다.

 

셋째로 주인공은 처음부터 체제 순응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아르노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그 하나는 지금까지 아들을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키웠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헤프너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모든 입장을 순식간에 바꾸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르노가 어느 정도의 자기기만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전후 시대에 독일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불의에 대해 저항하는 방식을 체득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한스는 자신을 기회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자신을 변호하고 있지만, 이로써 그의 행동에 하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스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저항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일을 어떻게 행하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Bronstein: 85).

 

엘레는 상기한 주인공의 성격을 한마디로 도피적이라고 규정한다. (Bronstein: 123). 그미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어떤 특정한 견해를 고수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스스로 실천할 의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자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스는 지금까지 갈등을 회피하고, 체제 순응적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간수로 일하던 헤프너의 처지를 동정할 정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엘레는 병원을 찾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가 세계의 중점이야.” (Bronstein: 159). 그러나 주인공은 유감스럽게도 엘레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는 누나의 말에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자고로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라는 고유한 존재의 핵심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다시 말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가능성이 무엇이며,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 그리고 이를 두려움 없이 발설할 수 있는 용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지금, 이곳”은 -쿠자누스 Cusanus도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세계의 중점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생각을 자발적으로 수용할 줄 모른다. 그러한 한 그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물론 작가는 제 27장에서 주인공이 변화될 여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첫 번째 인간은 아니다. 비록 자기 연민 속에서 헤매면서 나 자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은 변화될 것이다.” (Bronstein: 230).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