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서로박: (2) 문창길의 시, 꽃의 상징성

필자 (匹子) 2024. 1. 9. 09:33

(앞에서 계속됩니다.)

 

3.

: 이어지는 시는 메꽃 2입니다.

 

가슴이 시큰거려 온다 굼실굼실 더듬어 올수록 무슨 살맛을 알았는지 뻔질나게 드나드는 들개미는 헐어빠진 가랭이 사이로 성긴 발길이 분주하다 하혈이 흐르는 세상 좀 더 아름답게 살기 위하여 낮게 엎드려 꿈꾸는 동구밖 암캐 같은 꽃님이 분홍옷 벗고 거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움켜진 흙 한 줌... 실뿌리 같은 주먹 손으로 부끄러운 속살을 감추지 못하는 슬픈 꽃잎 하나 묻고 있다

 

: 두 번째 작품은 첫 번째 작품과는 달리 둔탁하고 작위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그건 유연한 만남을 통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메꽃은 작품에서 몸을 파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곤충 한 마리가 메꽃의 알몸으로 향해 굼실굼실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들개미는 남성성을 지닌 생명체로 이해됩니다. 놈은 상대방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황홀감을 다시 추체험하기 위해서 메꽃에게 분주하게 접근합니다. 말하자면 들개미는 어느새 살결 마주침의 쾌감,  살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은 그 자체 순진무구하지 않습니다. 돈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 아 그래서 시인은 하혈이 흐르는 세상이라고 표현했군요.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피흘림을 강요하고, “모든 사물의 목표nervus rerum를 오로지 으로 환산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득과 손해의 문제가 사랑의 관계에 첨가되지요.

: , “꽃님이는 마치 동구밖 암캐”, 즉 몸을 파는 처녀입니다. 시인의 눈에는 슬픈 꽃잎이 애처롭게 각인됩니다. 가슴 시큰거리는 주체는 여기서 시적 자아인 것 같아요. 아니면 메꽃과 같은 여성일까요? 몸에는 상흔이 가해지고 서서히 망가지게 됩니다. 메꽃은 낮게 엎드려 생활하지만,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기도 합니다.

 

: “실뿌리 같은 주먹 손의 그미가 부끄러운 속살을 감추지만, 어느새 자신도 몰래 거친 숨을 몰아쉬곤 합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미묘한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데요?

: 그건 메꽃이 복합적 감정을 대변하기 때문이지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메꽃의 이중적 정서,  부끄러움 그리고 은밀히 느끼는 오르가슴을 유추하리라 여겨집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매춘에 관한 문제 제기가 아닙니다. 다만 시적 자아는 돈이 개입된 사랑이란 옳든 그르든 간에 그 자체 부자연스럽고 혼탁할 수밖에 없음을 은근히 전해줍니다.

 

4.

: 그런데 두 작품에서 어떠한 특징이 주제 상으로 서로 구분하게 하는지요?

: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메꽃 1이 우연히 체험한 사랑 그리고 임에 대한 기억을 노래하고 있다면, 메꽃 2는 돈을 매개로 한 어색한 만남, “부끄러운 슬픔을 묘파하고 있습니다. 전자가 순진무구하다면, 후자는 철저히 부자연스럽고 거짓된 관계를 시사해줍니다. 그것은 인위적(人爲的)인 동시에 인위적(人僞的)입니다. 동식물은 상대방을 속이면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짓된 사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 언젠가 브레히트 역시 다음과 같은 두 편의 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사건 1, 행복한 사건 2을 가리킵니다.

 

아이가 달려온다.

엄마, 앞치마를 입혀줘!

행주치마가 걸쳐진다. (행복한 사건 1의 전문. 박설호 역)

 

여기 너희를 위해 지은 집이 있어.

집은 무척 넓고 튼튼해.

너희에게 좋은 집이니, 들어와.

목수 그리고 벽돌공

배관공과 유리공이

머뭇거리며 다가온다. (행복한 사건 2의 전문. 박설호 역)

Bertold Brecht: Berliner und Frankfurter Ausgabe, Bd. 15, Frankfurt a. M. 1993, S. 262f.

 

: 브레히트가 1950년에 집필한 단시입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해야 할 것 같아요. 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사건Vorgang”이라는 단어는 엄밀히 따지면, “사건의 진행 과정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소한 사건에서 나타나는 진행 과정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지요

: 다른 사항은 무엇입니까?

: 두 번째 시에서 집을 직접 지은 사람은 건축 노동자들이 아니라, 당국입니다. 당국이 자신의 의도대로 집을 지어, 노동자에게 입주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1949년에 건립된 구동독은 노동자를 위한 국가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로 자처했지만, 노동자를 위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엘리트 관료주의가 득세했으니까요.

 

: 재미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머뭇거리며”, 낯선 집 안으로 들어선다는 사실입니다.

: 그게 핵심사항이지요. 첫 번째 시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앞치마를 입혀주는 까닭은 아이가 자발적으로 원하기 때문이지요. 브레히트는 이러한 사건의 진행 과정을 행복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두 번째 시에서 목수”, “벽돌공”, “배관공 그리고 유리공은 집 짓는 것을 업으로 삼지만, 처음부터 건축의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마음대로 집을 지어서, 노동자들에게 그냥 들어와 살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자발적이고 유연한 과정이 행복한 사건이라면, 상명하달의 행동 내지는 껄끄러운 정책이 인위적이고, 그 자체 불행이라는 말씀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아이에게 앞치마가 채워지는 것은 아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랑과 성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당사자는 엄연히 여성이며, 또 그래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바라보세요. 온갖 치장으로 암컷을 유혹하는 동물은 대체로 수컷이 아닙니까? 그러나 가부장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치장해야 하는 존재는 주로 여성들입니다.

: 남성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는 오늘날 많이 바뀌지 않았나요?

 

: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남창(男娼)이 많지 않아요. 신문 지상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끊임없이 실립니다. 오죽하면 어느 시인은 여성들은 항상 쫓기며 살아간다.”고 토로할까요?

: 사랑의 삶에 있어서 모든 선택권을 지닌 당사자가 여성이라는 선생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여성이 사랑을 요구할 때, 남성이 이를 받아들이면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남성이 사랑을 강요할 때, 여성이 마지못해 이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의 치욕으로 느껴지는군요. 왜 그럴까요?

: 거기에는 성관계 이전에 이미 남성적인 힘과 위력이 개입되기 때문이지요. 매춘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