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

필자 (匹子) 2024. 6. 27. 09:23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한번 처다볼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는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사고는 무척 깊습니다.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한번 처다볼 틈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처음에는 화무십일홍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유한성은 이 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합니다. 청춘의 열정과 갈망은 참으로 크고 강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열정과 갈망을 청춘의 내부에서 그리고 청춘의 외부에서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청춘의 열정과 갈망은 주어진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냥 허망하게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힘들게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꽃잎을 활짝 펼쳤지만, 잎이 질 무렵에는 그냥 힘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꽃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그런 것일까요? 둘째로 외부에서 고찰할 때도 시구는 다음의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어떤 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겨를도 없이 꽃들은 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 시간의 인식론이여. 만남과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부수적인 감정에 의해 자신의 속내가 은폐되어 있는가요? 죽음과 이별은 이처럼 순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는데, 굳이 피어나는 아픔과 고통에 애면글면할 필요가 있을까요?

 

선운사에 핀 꽃무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