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잎이 제 몸을 등불로 하여
산마다 공양을 올린다
가을을 지나가는
구름의 복부를 밝히고
죄가 쌓인 내부를 비춘다
이것이 우리 세계가 만드는 노을이다
없다면
천하고 비참함 그대로 얼어갈 테니
장석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도서출판 강 63쪽
.................
너: 장석 시인의 창작 욕구는 마치 활화산처럼 느껴지는 군요, 불과 6개월만에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가 간행되었습니다. 모다기로 태어난 예술적 자식 -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창작에 쏟는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분명한 것은 시인의 상상에 거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신선처럼 때로는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시적 대상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도 어떠한 치장도 용납하지 않고 있어요.
너: 그럴듯한 비유로군요.
나: 시인은 시간 관념과 공간 개념을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전지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묘사하는 시인의 태도에는 모든 감정과 욕망을 삭인 초월적인 자세가 넘실거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독자에 다가가는 대신에, 시인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충실하게 드러내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 이러한 성향은 인용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나: 그렇습니다. 단풍은 “제 몸을 등불로 하여” 가을에 “공양”을 올리는 스님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붉은 빛은 우리 주위를 붉은 노을로 물들입니다. 여기에는 하늘에서 스쳐 지나가는 “구름”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세계가 만드는 노을”이라고 합니다.
너: 이것은 아침 여명도 아니고, 저녁 햇빛에 붉게 물드는 황혼 빛도 아니지요?
나: 그렇습니다. 시인은 "구름의 복부"가 붉게 물드는 까닭이 햇빛 때문이 아니라, 단풍의 붉음 자체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단풍의 붉은 빛은 생명이 능동적으로 직조해내는 "노을"입니다.
너: 그런데 생명 속에는 어떤 “죄”가 묘하게 숨어 있습니다.
나: 그것은 원죄일 수도 업보일 수도 있겠지요.
너: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릅니다.
나: 단풍은 이러한 생명의 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단풍은 붉은 색깔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세상에서 저지른 은밀한 범행을 느끼게 합니다.
너: 아니면 장자(莊子)가 소요 편에서 그렇게 상정한 바 있듯이 살고 있는 이곳이 작은 세계이며, 저세상이 더욱 찬란하고 광대한 “별승”일까요?
나: 글쎄요. 마지막 연에서 장석 시인은 또 한 번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 낙엽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천하고 비참”할까요?
나: 물론 노을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의 단서 내지 흔적을 은밀한 부호로 전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체의 자기반성으로서의 붉은 빛은 자연미로서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반증합니다.
너: 자연미, 다시 말해서 단풍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아도르노도 자신의 주저 『미학 이론Ästhetische Theorie』에서 언급한 바 있지요?
나: 네, 그것은 스러져가는 인간의 갈망의 마지막 흔적으로 드러내는 일시적인 찬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경우 아름다운 단풍의 찬란함은 문학 작품 속에 은밀하게 반영되어 있는 인간의 갈망의 상흔 내지는 스러져가는 유토피아의 편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 언젠가 루카치는 20세기 초 표현주의 예술 정신을 퇴폐적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습니다. 표현주의 예술작품은 언제나 자본의 추악한 꿈틀거림을 반영한 퇴폐적인 사조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그렇게 말하면서 루카치는 1848년 이후의 대부분의 실험 예술의 경향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이때 한스 아이슬러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물론 표현주의 예술은 스러져가는 자본가의 퇴폐적인 세계관 그리고 허망한 몰락의 일시성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작품 속에 반영된 황혼의 아우라는 얼마나 찬란합니까?”
너: 각설 장석의 시작품에서 단풍은 “구름의 복부”마저 붉게 물들일 정도로 가을의 산하를 찬란하게 뒤덮게 만듭니다.
나: 그렇습니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탄생과 죽음과 결부된 어떤 잘못, 혹은 죄의 단서를 스스로 찾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너: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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