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중세 문헌

서로박: 천일야화, 스토리텔링 (3)

필자 (匹子) 2021. 11. 27. 16:37

9. 이야기의 배열과 내용줄거리는 처음부터 주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세헤라자드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사랑과 성, 정조와 배신 그리고 이로 인한 처절한 아픔 등을 삽입시켰습니다. 이는 현혹된 기억으로서의 “이미 본 무엇Déjà-vu”, 가령 샤리야르 왕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의 강도를 서서히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이 점은 천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끝낸 다음에 고백한 그미의 말에서 확인됩니다. “저는 칼리프와 제왕 및 다른 분들이 여인들로 인해 겪었던 일들을 폐하께 오랫동안 이야기해왔습니다.” 추측컨대 왕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 혼자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게 아니구나. 나처럼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구나.” (Ott 2010: 11)

 

이러한 상념이 스칠 때 왕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속 깊은 상처가 자신만이 겪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속 한의 응어리를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객관화시킨다는 점에서 마음의 벗어남 (偏心) 내지 마음을 옮겨놓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변학수: 16). 가슴속에 맺힌 한이 풀리게 된 것은 제 삼자의 이야기가 스스로 느끼는 마음의 부담이나 상처를 달래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 치유의 한 효과로서 마음의 부담 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 스토리텔링 치료는 성공을 거두다.: 중요한 것은 세헤라자드가 1001일 밤의 설화가 끝나는 시점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왕비에 대한 샤리야르의 증오심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약화되다가 끝내 사라지집니다. 세헤라자드는 약 3년에 걸친 치료의 과정을 통해 세 명의 왕자를 낳았습니다. 왕 역시 그미를 자신의 은인으로 여기고 진정한 반려로 맞이하게 됩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세헤라자드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이야기 치료를 행하는 진정한 치료사인 셈입니다. 그미는 이전에 이미 수많은 시, 전설, 교훈, 역대 군왕의 이야기, 연대기, 철학 등과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을 치료하였던 것입니다. 세헤라자드가 치료에 동원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 형상적 표현, 말하기, 철학적으로 사고하기, 역사에서의 지혜 수집 등과 같은 인문학적 방법이었습니다. 그미는 감정이입, 카타르시스, 동일시, 보편화 등의 인문학적 기법 등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였습니다. (이민용 A: 280).

 

11. 스토리텔링을 위한 네 가지 기법첫째로 감정이입은 타인의 삶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투여해보는 경우입니다. 독서 시 그리고 영화 감상 시에 느껴지는 현상입니다. 호라티우스Horaz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으려면 그 내용이 “나”와 결부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카타르시스는 억압된 갈등 (분노) 등을 스스로 감지하고 이를 다시 기억할 때 출현하는 심리적 순화입니다. 정서적 감흥은 자신의 체험과 인성으로 각인된 마음의 크기와 강도에 의존합니다.

 

셋째로 동일시는 한 인간의 분노, 슬픔, 질투 그리고 두려움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파악하고 자신 역시 얼마든지 이러한 감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입니다. 넷째로 보편화는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을 자아로부터 일탈시키려는 노력을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자아로부터 일탈시킬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고통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면, 치료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12. 자신의 고통을 멀리서 객관적 관점으로 바라보기여기서 특히 네 번째 사항은 설명을 요합니다. 문제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고찰하는 일입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뇌하는 자아의 소멸 내지는 번민하는 자아로부터의 일탈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것은 장자(将子)가 말하는 자아의 초상 치르기, 즉 “오상아 (吾喪我)”와 관련되는 사항입니다.

 

“사람의 소리 (人籟)”, “땅의 소리 (地籟)”는 제한되고 유한하며, 편협한 것이므로, 이를 떨치고 더 큰 “하늘의 소리 (天籟)”를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도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일과 관련됩니다. (윤재근: 28). 고통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감정입니다. 오랜 고통 속에서 순간의 희열을 느끼는 게 우리니까요. 우리는 자아의 고통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분들이 기도와 참선으로 도를 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