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업 도시 그리고 헬레니즘의 토대
아비켄나는 의사로 활동했을 뿐, 평생 한 번도 수사로 봉직하지 않았습니다. 그 밖의 대부분 이슬람 사상가들 가운데 수사로 일했던 사람은 거의 드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았고, 주로 자연과학자로서 사고했습니다. 그래, 이슬람 사회 전체는 중세 유럽에서의 사회적 법칙과는 다른 사회적 정황 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물론 이슬람 사회가 봉건적 형태를 드러내었으며, 전쟁을 부추기는 사제 계급이 득실거리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당시 중동 지역은 문화적으로는 대가족 제도의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초기 시민사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상업 자본이 주도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사회의 근본적 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메카는 이슬람 문화의 본거지로서 오래 전부터 거대한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뿐 아니라, 지중해의 여러 나라 상인들이 서로 만나는 요충 지역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무함마드 이전의 시기부터 황무지에서 정주하는 일부의 부족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이리저리 방랑하며 살았습니다. 가령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짓는 베두인 족속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낙타를 몰고 이곳저곳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문건을 팔곤 했습니다. 무함마드 역시 아주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상인의 딸과 결혼한 바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상업 중심지인 메카와 함께 페트라Petra와 보스트라Bostra라는 도시가 부흥했는데, 이곳에서는 아라비아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무함마드가 기원후 632년에 사망한 지 몇 년 후에 지도자 오마르는 바스라 항구도시를 창건하여, 페르시아 지역을 항해하는 모든 선박이 정박하도록 조처했습니다. 이 모든 규정을 만들고 시행한 사람들은 주로 아라비아 사람들이었습니다. “낱말의 위트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아라비아의 여러 도시들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그리고 밀라노보다 무려 5세기 정도 앞서 있었다고 말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럽은 여전히 농업 경제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방에서는 상업의 자본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마련한 가장 오래된 자본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마치 “무함마드의 방랑 기간Hidschra”이 그러하듯이 거의 백년에 이를 정도의 기나긴 세월동안 서쪽으로는 에스파냐로,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물론 아라비아의 기사들은 스스로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는 자라고 지칭하곤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신비로운 항해사, 신드바드의 뜻에 따라 활약하는 기능인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라비아의 중세의 문화는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상인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은 수없이 많은, 기상천외한 상품들을 구하거나 직접 만들어서 세상 전체로 유통시켰습니다. 이에 반해서 중세에 살던 유럽 사람들은 몇 개의 도시 아니면 거친 황야에서 성 (城)이나 사원에 고립된 채 살아가지 않았던가요? 당시 아라비아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유럽에서 시도되는 아랍 국가 건설의 노력보다도 더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유럽의 많은 사원에서 학교가 생겨나고, 이로 인하여 대학들이 출현하게 되었지만, 이전의 시기에는 아라비아의 지역에서 더 찬란한 문화적 불빛이 찬란하게 비쳤습니다.
동방에서는 상업과 방랑의 삶 외에도 책과 문헌이 활발하게 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후기 고대의 학문적 전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역사에서 나타난 어떠한 민족 대이동에 의해서도 방해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시리아에서는 이러한 후기 고대의 학문적 유산이 가장 생동감 넘치게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이를테면 비잔틴 기독교 문화의 경직성이라든가 초월을 추구하는 엄격함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이를테면 이암블리코스Jamblichos는 가장 열정적으로 고대 신들을 연구하던 신플라톤주의자인데, 바로 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무함마드가 활동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대부분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기원전 7세기에 그리스 철학서적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라비아의 전통이 페르시아의 빛 숭배 사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페르시아의 농부와 기사들은 오래 전부터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였습니다. 당시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로부터 핍박당하여, 페르시아로 도주했는데, 그 결과 이들은 페르시아 전역에 자유의 정신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산 왕조의 “호스루 1세Chosru I”는 자연에 충실한 공산주의에 속하는 모든 단체를 철저하게 탄압했는데, 이로 인하여 페르시아에서는 학문 추구를 통한 자유로운 정신이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호스루의 본명은 “누시르반Nuschirban”인데, 이 이름은 “죽지 않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호스루 1세의 영향으로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이슬람 종교가 번성할 때까지 사제 계급이 득세했는데, 이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어쨌든 페르시아에서는 사제들의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연기를 피우면서 경직된 제식을 올리고 황량한 미신들을 마구 전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대 이란에서 빛을 숭배하던 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이 죄악과 싸우는 데 있어서의 선의 정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이성과 사회의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비켄나는 부하라의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부하라는 바그다드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호스루 1세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이란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그다드는 기원 후 8세기부터 아부 자파 알-만주르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지금도 아라비아와 이란의 문화를 결합시킨 가장 훌륭한 도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그다드는 사실상 꾸란보다도 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정도입니다. 도시는 당시 문명이 얼마나 훌륭하게 만개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이곳에서 찬란하게 드러난 아라비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문화는 이성을 적대시하는 기독교의 독단주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의 지조는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는데, 동일한 문화권이지만,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에스파냐의 코르도바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철학의 영역은 이슬람 토양의 온실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식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철학은 바로 부하라에서 그리스와 시리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항은 어째서 유명한 이슬람 사상가들이 수사가 아니라, 의사로 활동했으며, 신학자가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는 학자였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려줍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철학자가 자연을 탐구하는 행위를 비정상이라고 치부할 정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중세 유럽에서 자연을 탐구한 철학자로서 기껏해야 로저 베이컨 그리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등만 거론되지만, 아라비아의 스콜라 학자의 경우는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라비아 철학자의 경우 자연과학은 신학의 시녀가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테면 꾸란의 특정한 단락을 해석할 때도 자연이라는 대상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아비켄나는 「부활에 관하여De Almahad」에서 꾸란의 제 36장을 해석하고 있는데,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다시 탄생하는, 이른바 부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쪽이든 서쪽이든 간에 이슬람 문화권의 나라에서는 세계의 학문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바그다드의 아바시드 왕조든, 에스파냐의 오마야드 왕조든 간에 이슬람의 왕들은 자연과 세상의 학문 탐구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치장하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슬람의 칼리프는 당시 시대에는 결코 교황의 권력까지 침범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아라비아 사회가 상업 정치적인 토대를 상실한 다음에 이곳에서는 이성을 적대시하는 독단론이 서서히 세력을 떨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까지 이른바 이교도의 고대 문화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베이컨은 아라비아 철학자들이 탐구한 고대 문화를 “실험의 과학scientia experimentalis”이라고 명명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한술 더 떠서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분명한 목표를 지닌 채 탁월한 실험을 거듭한 발명가들이라고 칭송한 바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의사들이 이룩한 업적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들의 사상적 토대와 사고의 유형은 봉건적 토대 위에서 수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의 사상가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지요. 비록 그들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학문적 내용으로 다루고, 신비주의의 경향을 표방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동방의 학자들 역시 공교롭게도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적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어서, 신비주의의 요소를 자신의 사상적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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