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은 ‘물질로부터 형태의 추출eductio formarum ex materia’이다.” (아비켄나 – 아베로에스)
1. 결코 같지 않다.
모든 영특한 사고는 아마도 일곱 번 깊이 숙고한 다음에 출현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동일한 사고를 언제라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시간 그리고 다른 상황 속에서 떠올린 동일한 사고가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사람만 변해 있는 게 아니라, 사고의 대상으로 떠올려야 하는 사물 역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변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특한 사고는 언제나 그 자체 신선한 의미를 드러내는 무엇이며, 하나의 새로움으로서 보존되어야 합니다. 동쪽 지역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이후의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의 빛을 구출했을 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을 독자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2. 주의할 점과 생각할 점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븐 시나Ibn Sina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 표현하면 아비켄나입니다. 그는 기원 후 980년 부하라 근처의 아프샤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속했던 부족은 타슈켄트 민족이었습니다. 아부 알리 알-후세인 이븐 압달라 이븐시나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정성을 다하여, 아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아비켄나가 많은 것을 일찍 습득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비켄나는 모든 것을 신속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대수학, 기하학, 논리학, 천문학을 공부한 다음에 그는 바그다드 대학교에 등록하여 그곳에서 주로 철학과 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불과 18세의 나이인데도 정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혼자서 약국을 경영할 정도로 약학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비켄나는 (현재 이란의 수도이지만, 과거에는 에크바타나라고 불리던) 하마단 시장의 “부관 Wesir”으로 일했습니다. 뒤이어 이스파한 제후 휘하에서 그를 돕다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파한 공국이 하마단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비켄나는 바그다드의 태자와 함께 여행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이미 대단한 의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아비켄나는 종교학 단체의 여러 모임에 가담할 때부터 자신을 거부하는 적들과 조우해야 했습니다. 적들의 발언에 의하면 아비켄나는 어린 나이에 너무 과도한 사랑을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난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아비켄나가 열광적이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의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는 그의 저술 활동에서 엿보입니다. 아비켄나는 평생 99권의 문헌을 남겼습니다. 약제학 그리고 철학에 통달해 있었던 아비켄나는 주로 의학의 영역에서 가장 표준이 되는 문헌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 의학 전문서적은 중동 지역에서 그리고 서양에서 거의 수백 년 동안 질병 치유를 위한 고전으로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대표적 철학 서적의 제목 역시 놀라운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치유의 서 Kitab ash-sifa”가 바로 그 제목입니다. 아비켄나는 육체를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유하는 기술을 오성의 영역으로 전환시켜서 모든 것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치유의 책은 하나의 백과사전으로서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네 가지 주요 학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논리학, 물리학, 수학 그리고 형이상학입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11세기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혼에 관한 요약Compendium de anima」, 「부활에 관하여De Almahad」,「영혼에 관한 경구들Aphorismi de anima」, 「학문의 규정과 탐구에 관한 논문Tractatus de definitionibus et quaesitis」「학문의 분화에 관하여 De divisionibus scientiarum」그리고 「형이상학Metaphysia」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밖의 아비켄나의 반-독단적인 문헌들은 안타깝게도 유실되었습니다. 이것들 가운데 이후의 철학자들의 글에서 경미하나마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문헌이 있는데, 우리는 가령 『오리엔트 철학Philosophia orientalis』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밖에 두 권으로 이루어진 백과사전 『지식의 서Danish-Nameh』이 있는데, 이 책은 학문적 객관성을 고려할 때 독단론과는 거리가 먼 문헌입니다. (『지식의 서』는 1937/ 38년에 테헤란에서 간행되었는데, 이란어로 기술되어 있어서 일부의 작은 독자층에 의해서 이해될 뿐입니다.)
아비켄나는 1037년 이스파한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비석은 하마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거기에 위치한 그의 비석을 접할 수 있습니다. 1952년 이란의 평화위원회는 하마단에 모여서, 위대한 철학자를 기념하며 예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창한 바 있습니다. 사실 아비켄나가 활동했던 소아시아의 이란과 아라비아의 문화는 당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만큼 아비켄나의 사고는 진취적이며, 폭넓었다는 것을 반증해줍니다. 그가 탄생한 지 1000년이 되는 기념일은 유럽의 시간 개념과는 전혀 일치되지는 않지만, 이슬람의 음력의 개념으로 고찰할 때 딱 들어맞는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유럽의 연대기 서술자는 오리엔트 지역의 스콜라 학문을 더욱더 세밀하게 기억해내고 파헤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동 지방의 스콜라학문이야 말로 -유럽의 스콜라 학문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의 계몽주의 사상의 근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동지방의 스콜라 학문은 -이후의 장에서 자세히 고찰하겠지만-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생동감 넘치게 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혀 기독교에 의해서 착색되지 않은 고유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물질 이론의 노선을 언급하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라비아 사상가를 거쳐, 조르다노 브루노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이 존재합니다. 토마스가 저세상, 다시 말해서 내세의 정신에 골몰했다면, 브루노는 찬란히 만개하는 우주의 물질을 거론한 바 있습니다.
아비켄나는 후자의 사상적 흐름을 위하여 아베로에스와 함께 첫 번째의 매우 중요한 초석을 닦은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아비켄나 탄생 1000년을 기념하는 날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브루노로 이어지는 물질 이론의 사상적 흐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아비켄나를 기념하는 날이 수많은 기념일이 우연 내지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는 하루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이 날을 기억해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비켄나는 그동안 약 천년 이상 망각된 물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를 새롭게 신선하게 고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흔히 기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경박하지 않으며, 저세상을 중시하하고 갈구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다른 곳으로 이전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아비켄나는 물질에다 어떤 고유한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29 Bloch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아비켄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3) (0) | 2020.02.15 |
---|---|
블로흐: 아비켄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2) (0) | 2020.02.13 |
블로흐: 물질 개념의 역사 (2) (0) | 2020.01.15 |
블로흐: 물질 개념의 역사 (1) (0) | 2020.01.15 |
블로흐: 루터와 칼뱅 (2) (0) | 201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