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앙에 대한 지식의 관계
상기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아라비아 철학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물론 전해 내려오는 문헌에는 그들이 믿음에 관한 일반적 입장에 대해서 피력한 대목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충직하게 견지하겠다는 생각은 어떤 분명한 전제 조건에 의해서 축소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어른들은 아이들의 음식에 관해 별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싸구려 광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종교적 전언들을 단순히 혼탁한 사고가 뒤섞인 착상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아비켄나는 신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는 먼 훗날에 어느 철학자가 설파한 내용과 동일한 무엇을 발언했지만, 그의 발언은 다만 나름대로의 흐릿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종교 창시자들은 그림 그리고 우화 등을 동원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상에 관한 계시는 아비켄나에 의하면 만인을 위해 출현한 것이며,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구상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교 창시자의 언어와 법칙이 다른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게 될 경우, 그것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으리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철학의 과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사고를 발전시킨 인간이 종교를 오성 앞에 설정한 다음에 이를 검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적 전언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이유를 수동적으로 밝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발상으로서 이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즉 신의 말씀으로서의 꾸란에 대한 믿음은 아라비아 철학자들의 비판적 자세로 인하여 인간 오성의 힘에 대한 다른 유형의 믿음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요? 학자들은 전해 내려오는 종교에 대해 그다지 긴장감을 느끼지 않은 채 그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학자들에게도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모든 연구의 방향 설정에 개입하곤 하는데, 이슬람 사상가들은 아주 경미한 범위에서 종교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편 그들은 어떤 계시라든가 초이성적인 잔여물에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성이 종교적 전언 앞에서 더 이상 학문적으로 무언가를 밝힐 수 없어서 항복을 선언하는 경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람들은 종교의 구상적 언어를 마치 그림으로 그려진 수수께끼처럼 받아들여서 이를 해결하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은폐된 공간 속에는 어떤 신비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아비켄나는 무함마드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을 중시하였습니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 속에 인류의 지고의 정신이 구현되어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분명한 사항은 학문이 절대적인 무엇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독교 스콜라 학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가령 그들은 1200년 후의 시점에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도의 원조praecursor Christi”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슬람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순히 그런 식으로 무함마드의 선구자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선지자 내지 선구자로 추앙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아베로에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체가 인간 이성의 출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무함마드의 빛은 인간 이성과는 차원이 다른 첫 번째 교육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종교의 내용은 진리의 측면이 아니라, 신화 그리고 가상적 이야기, 즉 우화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기독교 스콜라학자들은 신앙과 지식을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한 반면, 이슬람 학자들은 그것들을 서로 구분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스콜라학자들은 안셀무스 캔터베리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신의 계시를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발생한 사건으로 수용했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교부 철학자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Scotus Eriugena의 경우에도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사상은 내용상으로 매우 이단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신플라톤주의와 아라비아 사상으로부터 자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참된 종교를 최상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 의하면 “참된 오성vera ratio”은 “참된 권위vera auctoritas”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성은 오로지 참된 신앙을 이성에 합당하게 표현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라비아 철학자들이 이해한 지식과 종교의 관계를 완전히 정 반대로 뒤집어놓았습니다. 실증적 종교가 철학의 잘 알려진 전단계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빛이 주님의 계시를 말해줄 수 있는 전단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가 내용상으로 고찰할 때 신앙과 지식을 서로 조화롭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종교에 대한 확신,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근본적 역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의 근본적 역설이란 사도 바울이 세계의 지혜와 정반대되는 무엇으로 이해한 것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터무니없기 때문에, 오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다.Credo quia absurdum es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철학자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인데, 그의 사상적 핵심은 오로지 신앙으로서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초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토마스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을 통해서 신앙의 근원 속으로 파고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불가해성은 그의 공로인 셈이지요. 아비켄나가 인식과 빛 (바로 지고의 빛 내지 근원의 빛)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토마스는 인간의 인식과 신성으로서의 빛이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논의 자체를 그는 중요한 관건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라비아 철학자들의 오성이 자연 내지 주어진 현실과 전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대에 오성은 유일한 힘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문헌으로부터 막강한 설득력을 도출해내어 신앙의 본모습을 밝혀내어, 이 가치를 하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아라비아 철학자들의 사고를 보조해준 것은 기이하게도 신비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어진 문헌에 대해 약간의 거리감을 취했던 것입니다. 신비주의의 사고는 중동지방에서 나타나, 나중에 알비겐 종파 그리고 에크하르트 선사에 의해서 표현된 바 있습니다. 신비주의 운동은 인민의 운동으로 퍼져 나가서 귀족과 고위 수사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밖에 페르시아의 상류층 가운데 아라비아의 이슬람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반감은 오랫동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가 이슬람 지역에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으로 인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아비켄나의 경우에도 이미 신플라톤주의 내지 영지주의의 빛으로 착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그다드의 문화 서클 속에서 시리아와 이란의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시리아와 이란 사람들은 꾸란 그리고 이슬람의 예식을 체질적으로 낯선 무엇으로 여겼습니다. 예컨대 바그다드와 바스라에서는 오늘날에도 고대 이란의 빛의 신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발견되곤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신비적 영지주의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빛이 외부로 나가서 모험을 감행한 다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비켄나는 자연에 대한 인식을 견지하면서, 처음부터 종교적 독단론과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 우주에 대한 그의 시각은 무엇보다도 빛과 관련된 우주론적인 형이상학으로 방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미신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미신에 대한 관심은 이를테면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경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비켄나가 모든 점성술의 신뢰할 수 없는 억측을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의 고유한 저서에서 점성술에서 나타난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한 바 있습니다. 아비켄나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신비주의의 단체인 수피 종파에 가담하였습니다. 수피 종파는 꾸란을 세밀하게 고찰하지 않는 신비주의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는 이슬람 사원을 거치지 않고, 인간의 영혼이 직접 우주의 근원적 빛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아비켄나는 바스라에서 활동하던 “순결한 수사들”의 단체에 가담하였습니다. “순결한 수사들”은 950년에 건립된 학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은 빛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학문적 내용을 백과사전식으로 재구성하였는데, 이들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순결한 수사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방향, 이를테면 세계와 영혼이 원초적인 빛으로부터 어떻게 현세로 회귀하는가를 밝히기 위해서 원초적 빛의 여행 서적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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