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7. “아직 아님”은 갈망의 심리학, 즉 종결되지 않는, 기도하는 갈구 행위로 이해된다. 블로흐는 역사와 관련하여 “초험성Transzendenz”이라는 개념 대신에 “바깥 영역Exterritorialität”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역사 자체와 비교될 수 있는 공간 개념으로서, “역사적 과정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Bloch, TE: 373). 이미 언급했듯이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은 갈구하는 의식을 심화시켜서, 어떤 소외 없는 삶의 길을 새롭게 찾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가득 채워 줍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을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성취는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룩될 수 없으며, 오로지 희망의 차원에서 이러한 방향을 추적할 뿐입니다. 이로써 미래는 “아직 아님”이라는 정언적 명령 앞에서 개방적 특징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유토피아의 정신』 제 1권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는 마치 기도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Bloch, GdU1: 445). 물론 블로흐는 부정적 신학의 문제를 부정적 인간학의 내용으로 치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는 행위는 블로흐에 의하면 미래를 예견하면서 갈구하는, 진리에 대한 주체의 창의적인 요구사항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가 언급한 바 있는 “은유Metapher” 또한 놀라운 철학의 행위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철학의 행위는 -“아직 아님”의 기능을 고려한다면- 순수하게 두뇌만을 활용하는 지성적 분석에 제한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비유를 통해서 인식 불가능한 무엇을 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근히 인식의 과정에는 이미지를 통한 절대적 메타포가 동원됩니다. (Hans Blumenberg: Paradigmen zu einer Metaphorologie, F. a, M. 1997, S. 75.) 메타퍼 속에는 인간의 전의식적 갈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마음속에서 어떤 유토피아적이고 창조적인 깨달음 내지는 착상을 일깨우게 해줍니다.
18. 역사의 결과물로서의 자기 동일성, 초시간적인 은총은 아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아직 아님의 존재론은 자기 동일성의 과정에서 신학적 특징을 관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아직 아님은 신학에서 은총에 관한 논의 사항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철학은 무언가를 기억하게 하고, 발견하게 하며, 놀라운 정보 제공을 통해서 어떤 진리의 핵심 사항을 안겨준다. 철학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므로 완전히 밝혀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전적인 완전성을 깨닫게 한다. 설령 그것이 구세주의 놀라운 작품으로서 그리고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작품으로서 우리에게 철학적 결과물로 표현될 정도이다.” (Bloch, TLU: 116).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블로흐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철학이든 신학이든 간에 개인사와 국가 전체 역사의 어떤 바깥 영역에 관한 핵심적 명제를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블로흐의 철학에는 초시간적인 은총을 안겨주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블로흐는 개인의 역사와 전체적 역사에서 어떠한 결과물로서의 존재의 근원적인 동일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과정이 어떠한 발전을 거듭하는지, 어떻게 존재의 핵심으로 근접하는지에 관해서만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Bloch, TE: 153).
19. “아직 아님” 그리고 희망: 여기서 논의되는 문헌은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그리고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입니다. 두 사람은 세계의 구원이 요청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직 아님”이라는 정서를 암묵적으로 용인한 바 있습니다. 블로흐는 그냥 사는 순간 가까이에는 구원의 비밀이 은폐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 필요성과 능력이 감지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절대적 의향을 견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개별적 사안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비참한 절망적 상태에서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희망은 우리에게 자극을 가하고, 변모를 촉구하려고 합니다. 희망이 작동되면, 최소한 “모두 없음”에 대항하는 나라가 인간의 의식에 마력적으로 투영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 있음”은 “역사의 시작부터 오로지 수행하는 의향으로서 갈망하는 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Bloch, TE: 277).
이러한 상은 맨 처음에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흐릿한 형이상학의 작업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희망의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작업입니다. 희망, “아직 아님”으로 표현되는 유토피아의 정신은 인간과 세계의 내부에서 그리고 인간과 세계 가까이에서 어떤 결과물을 완성해내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언급합니다. 희망의 반대쪽에서 비치는 불빛이야말로 하나의 척도로서의 결과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카테고리는 시간 위에 수직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정의 시간으로서의 그것이 없다면, 모든 카테고리는 존속되지 않을 것이다.” (Bloch, TE: 299).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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