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박설호: 블로흐의 "재기억" 비판

필자 (匹子) 2023. 11. 14. 09:29

1. 재기억 이론이란 무엇입니까? 블로흐의 "주체와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 Subjekt - Objekt. Erlaeuterung zu Hegel"는 헤겔 사상과 재 기억에 관해 논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란그리스어 단어에 의하면 “ανάμνηση”라고 하는데 , 플라톤 이래로 인식이론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란 과거에 존재한 불변의 사실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파악하려면 인간은 다시 기억 속에 그것을 소환해내면 족하다고 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다시 소환해내는 일이 바로 재-기억이라는 행위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고 속에 탈레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한 전매특허로서의 특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문은 새로운 무엇을 무시하고, 오로지 과거 사실을 밝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가 과거에 존재하는데, 이를 다시 기억해내면 족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기억 이론에 의하면 새로운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 헤겔의 변증법이 어째서 원의 순환으로 이해되는가요? 헤겔은 주지하다시피 변증법 사상을 추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변증법은 명제, 반대-명제 그리고 종합을 거쳐서 다시 명제로 환원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명제는 부정을 거쳐 하나의 원의 방향으로 되돌아오고 있지요. 그리하여 변증법은 다시 어떤 더 높은 단계의 명제를 포착합니다. 이로써 이전의 과정이 반복되지요. 수정된 명제는 다시 수정된 반대-명제에 의해 종합의 단계를 거쳐서 다시 수정된 명제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은 원을 그리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합니다.

 

명제 (과거의 실체)는 반-명제 (현재의 실체)를 거쳐 다시 명제 (새롭게 정리된 과거의 실체)로 환원되니까요. 따라서 미래는 헤겔의 변증법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영역에는 항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 (無)만이 남아 있어요. 말하자면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시 기억되고 잠시 구체성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격언은 헤겔에게 적절합니다. 다름 아니라 “달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 Nihil novum sub luna.”는 격언 말입니다.

 

3. 블로흐의 사고에 나타난 새로운 무엇이 재 기억 이론을 비판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서양의 학문은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찾는 작업을 중시해 왔습니다. 불변하는 진리를 기억해내고 소환해내면 족하니까요. 이는 서양의 학문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 역시 온고지신 (温故知新)을 강조했지요. 서양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사물이 오래 되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더 진정성을 표방한다고 말입니다. 가령 화강암과 거품의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화강암은 현재 순간적으로 발생한 거품보다 더 진정하다고 여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자연은 그럴지 몰라도 인간의 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블로흐는 인식론에 있어서 재-기억이 아니라, 미래의 사실을 밝혀내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블로흐의 저서 『희망의 원리』 그리고 『유토피아의 정신』은 “새로운 무엇Novum”이라는 인식이론의 특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새로운 무엇은 한마디로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카테고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 관계에서 마치 계모가 그러하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어, 철학 영역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4. 헤겔은 미래를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헤겔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 가운데 미래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 파악했습니다. 미래는 헤겔의 경우 공허한 바람 내지 일시적으로 머무는 허섭스레기에 불과했지요. 다시 말해 미래는 알갱이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불필요한 찌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미래의 영역을 한 번도 중점적으로 언급한 바 없었습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예외적으로 몇몇 놀라운 구절이 발견되고 있을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암시를 던졌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잠재적 역동성 dynámei ó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몇 가지 예외적 발언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직적 측면에서 전체성을 고려하여 미래에 어떤 실질적이고 주도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5. 헤겔에게 가능성이란 어떻게 이해됩니까? 그런데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비록 그가 세계정신의 차원에서 과정을 강조하고, 변화되어나가는 역사를 상정하고 있지만- 가능성의 카테고리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사고 행위에는 두 가지 사항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다름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리고 현실적인 무엇이 그것들입니다. 이 경우 가능한 무엇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현실적인 무엇으로 처음부터 작동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현실적인 무엇으로 즉시 연동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헤겔은 생각하는 것이지요. 철학의 역사에서 가능성의 카테고리는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하나의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6. 새로운 무엇이 재기억 이론과 대치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재 기억 이론은 그 의향에 있어서 과거로 향하는 데 비해, 블로흐가 주장하는 새로운 무엇의 이론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무엇은 재 기억과는 반대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현재 이후의 시점인 미래의 영역에서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미래, 최전선, 새로운 무엇, 유토피아, 희망 그리고 가능성 등은 블로흐의 철학에서 하나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게 하는 사상적 동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새로운 무엇을 실험하고 가꾸어낼 수 있는 조직적 체계의 장소로 인식되는 것이지요. 이로써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유동하는 무엇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생동하며, 끊임없이 발효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내용을 1974년의 마지막 저서『세계의 실험 Experimentum mundi』에서 구명하려고 했습니다.

 

7. 예술 속에 반영된 새로운 무엇을 설명해주세요. 새로운 무엇의 이론은 미메시스와 반대됩니다. 미메시스의 개념은 플라톤에 의해 약간 혼란스럽게 사용된 바 있지만, 아름다움의 본질이 현상이 아니라 이데아에, 현재가 아니라 이전의 시점에 확정되어 있다는 사고에서 출발합니다. 미메시스의 개념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새로운 무엇은 지금까지 한 번도 출현하지 않은 은폐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세계 속에는 은폐된 아름다움으로서의 “모름다움”의 카테고리들 그리고 명징하게 확장되는 잠재적인 형체들이 숨어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이러한 “모름다움”에서 아름다움을 도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화가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조각가들은 이 점을 내면에 지니고 품고 있었습니다. 세계 속에 가득 차 있는 수많은 형상들은 그들에게는 예술적 시도가 되고, 모델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예술작품은 어떤 아직 외부로 출현하지 않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형체들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를 위해서 블로흐는 “예측된 상” 내지 “선현Vorschein”이라는 예술적 카테고리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8, 블로흐는 진정한 창세기가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계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세계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작동되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역사가 있고, 세계의 과정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신학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시작됩니다. 그것은 “로고스λόγος”이며, 그 자체 불변하는 진리이자 신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세계는 지금까지의 유대교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로고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신의 막강한 권위 내지 반동적 과거지향성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이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세상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적인 파국 이후에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 관한 신념을 굳게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성자와 성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창조되는 것이지, 성부의 권위주의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태초에 신이 완전한 시작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창세기는 블로흐에 의하면 시작 (알파)이 아니라, 마지막 (오메가)에 제 기능을 발휘하리라고 합니다.

 

9. 새로운 무엇과 관련하여 블로흐의 질문, 놀라움 그리고 어두움의 개념을 설명해주세요. 블로흐는 세상에 즐비하게 늘려 있는 인식 이론적 그리고 예술적 진리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미셀러니를 모은 책의 제목이 “흔적들Spuren”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새로운 무엇으로서의 진리는 세계 곳곳에 마치 보이지 않는 흔적처럼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령 등하불명 (灯下不明) 그리고 진광불휘 (真光不輝)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단초를 가장 가까운 곳 내지 가장 밝은 곳에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가장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듯이, 완전한 삶을 체험한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불명료한 어두움입니다. 행복의 순간이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서 느껴지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가장 밝기 때문에 어떤 무엇은 명백하게 인식되지 못하곤 합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격언을 생각해 보세요. “등대 아래에는 빛이 없다”, “베짜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짜는지 간파하지 못한다.” 그리고 “고향에 안주한 예언자는 어떠한 제 역할도 하지 못한다.” 세상 어디서든 이러한 근친함 내지 이러한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우리는 때로는 시공간적으로 멀리서 어떤 무엇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10. 새로운 무엇 Novum이 미래지향적 진보주의라는 특성을 드러내는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에 집착하면, 우리의 관심은 미래로 향하지 못하곤 합니다. 이전의 사실을 기억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면, 우리의 관점은 대부분의 경우 미래로 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 속에는 밖으로 출현하지 못한 무엇, 스스로 객체화 되지 못한 무엇, 충분하지 못한 불완전성 등이 아직도 즐비합니다. 스스로 객체의 면모를 지니게 되면, 우리를 싸안고 있는, 세계의 객체들은 어디서든 자신의 면모를 부분적으로 그리고 잠시 드러내며 활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계의 “근원 Quelle”은 -야콥 뵈메Jakob Böhme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고통Qual” 그리고 “질적 특성Qualität”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항상 존재하는 불완전성이라는 변증법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과정 자체의 변증법은 우리 인간과 함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인간은 세상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능성 속에서 어떤 개방적인 목표를 품고 있다는 점을 숙고해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