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2)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필자 (匹子) 2024. 4. 29. 09:15

(앞에서 계속됩니다.)

 

2. 파국 앞에서의 진보에 관한 사고

 

미리 말씀드리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로 그의 ”역사 철학 테제“ 속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안에 관여하지만, 어떤 무엇을 선택하지 않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는 유대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에 대한 망설임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글인지 모릅니다. 소논문에서는 우유부단함과 숙고의 흔적이 너무 강해서, 저자의 명징한 견해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둘째로 역사 철학 테제는 파시즘의 폭력과의 상관성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모든 사회에 통용되는 보편적 역사 철학의 사고라고 확장될 수는 없습니다. 작품에서는 신학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 역사주의, 특히 사민당 사람들의 진보적 사고 등이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은 바이마르 시대의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무리 문헌 해석의 수용 범위가 폭넓게 확장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석자는 집필자가 처한 현실적 배경을 무작정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가능하다면 문헌의 내재적인 분석을 지양하려 합니다. 왜냐면 진보에 관한 숙고의 의미는 행과 행 사이를 두더지처럼 파고드는 치밀한 작업보다는, 역사적 관계성과 이를 멀리서 고찰하는 원시안적 시각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벤야민의 글쓰기에는 –아도르노의 말대로- 신비와 계몽이 서로 묘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Tiedemann: 25.) 그의 역사 철학 테제는 학문적 정교함에서 벗어나 모든 사항을 비유적으로 서술한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그렇기에 소논문을 가급적이면 간결하게 요약한 다음에 근본적 주제를 다루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테제에서 저자는 신학 그리고 유물론의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를 자동기계 장치로 비유합니다. 신학은 난쟁이에 비유되고 역사적 유물론은 인형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인형은 시합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지만, 실제로 인형을 조종하는 자는 테이블 아래에 숨어 있는 난쟁이입니다. “사람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명명하는 인형은 항상 승리한다고 한다. 인형이 신학을 고용할 경우, 인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사항을 다 받아들인다. 신학은 오늘날 추하고 작은 몰골로 변해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은 결단코 없다.” (Benjain, GS I.2, 693). 여기서 역사적 유물론은 결국 신학에 의해서 이리저리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 테제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과거는 오늘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즉 과거는 결코 고착된, 불변하는 전통의 구성 성분이 아니라, 체제에 발견되어야 하는 역사적 내용을 소지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 그 자체 주어진 사항을 통하여 구원에 관한 어떤 요구사항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요청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서, 오로지 어떤 특정한 순간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모든 현재를 사라지도록 위협하는, 하나의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이기 때문이다. 현재란 상 속에 떠올린 무엇으로서 인식되는 법이 없지 않은가?” (Benjamin, GS I. 2: 693).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은 경향적으로 고찰할 때 지배계급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승리자의 관점에 의해서 기술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패배자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재 속에 도사린 “미약한 메시아의 힘”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사적 유물론자는 지배계급을 고수하는 역사 서술의 경향을 깡그리 배격해야 합니다. 벤야민은 지금까지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승리자들을 위해서 체제 순응적 역사를 기술하였으며, 문화적 유산을 하나의 전리품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랑케의 역사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일곱 번째 테제에서 유물론자가 행하는 정반대 방향의 진행 방식에 관한 언급으로 끝납니다. “그 (유물론자 -역주)는 역사를 역으로 빗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생각한다.” (Benjamin, GS I, 2: 696).

 

아홉 번째 테제에서 폴 클레Paul Klee의 그림 「안겔루스 노부스」는 역사의 천사로 이해됩니다. 여기서는 진보에 대한 문제점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천사는 과거로 향해 바라보는데, 유일하게 끔찍한 파국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폐허 위에 다시 폐허가 겹겹이 쌓이고 있습니다. 천사는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쓰레기를 걷어차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면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강하게 불어와서, 자신은 꼼짝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지금까지 미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강력한 폭풍은 천사를 미래로 신속하게 쓸어갑니다. 그 사이에 천사 앞에 주어진 역사의 폐허는 하늘 위로 계속 자라납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입니다. (Benjamin, GS. Bd. 1/2: 698).

 

이러한 비판은 열 번째 테제, 열한 번째 테제에서 이어지는데, 이는 실제 현실에서 사민당SPD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닙니다. 독일 사회 민주당은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공짜로 주어져 있는” 자연을 철저히 맹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파시즘을 방해하기는커녕, 파시즘의 발전하는 데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 시대의 유산Erbschaft dieser Zeit』에서 언급된 바 있는 제삼제국에 관한 조아키노 사상의 왜곡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Bloch, EdZ: 135).

 

제 열두 번째 테제와 열세 번째 테제는 다음의 사항을 강조합니다. 즉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누구보다도 억압당하는 계급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해방된 손자”가 아니라, “억압당하며 살아가던 선조”를 고찰함으로써 가능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회 민주당은 잘못된 진보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Benjamin, GS I/2: 700). 사민당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대를 관통하여 스스로 움직여 나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진보란 사민당 사람들에 의하면 완전성으로 향하여 끝없이 향상되어 나가는 걸음걸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벤야민은 14번째 테제로부터 18번째 테제까지의 글에서 다른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유물론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영속성을 파기해야 합니다. 혁명의 시간은 과정이 아니라, 멈추어 서는 것을 뜻합니다. 가령 파리 사람들은 칠월 혁명 이후에 시계탑을 분쇄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사람들은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 즉 혁명을 감행하기 위하여 시간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혁명적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벤야민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는 다시금 거리감을 취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벤야민은 모든 사항을 역사 철학에 관한 논의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고 있습니다.

 

(3, 4,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