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94

서로박: 프리스의 문학세계 (1)

1. 서언 친애하는 F, 프리스는 폴커 브라운과 함께 동독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작가”에 해당하지만, 기이하게도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소설가이며 번역가입니다. 그는 1935년 에스파냐의 빌바오에서 태어났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부친의 사망 후에 어머니와 함께 구동독의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였습니다. 프리스는 김나지움의 과정을 마친 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영문학, 불문학 그리고 에스파냐 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독문학자, 한스 마이어 그리고 불문학자, 베르너 크라우스들이었습니다. 특히 크라우스는 프리스를 자신의 내제자로 받아들이고, “동독 학술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전수한 바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고전문학 그리고 ..

45 동독문학 2023.03.14

서로박: 폴커 브라운의 미완성의 이야기

1981년 베를린 작가회의에 참석한 브라운 친애하는 R, 당신은 극작가로 대성하고 싶어 합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동독 출신의 가장 다재다능한 작가, 폴커 브라운 (1939- )의 소설 “미완성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이 당신 꿈의 실현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브라운은 70년대의 중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구동독에서 언제나 커다란 토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브라운은 사회 정치적으로 적극적 태도를 취하는 사회주의자로서 “정체된 현재 (Status quo)” 대신에, 사회의 끝없는 변화 과정을 촉구하였습니다. 브라운의 작품에서는 장르의 한계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R, 작가들이 많이 살아가는 나라 K에서는 시인은 시만 쓰고, 소설..

45 동독문학 2022.12.27

서로박: 동독 문학 연구의 필요성과 한계 (2)

5.대신에 한국 문화 시장을 주름잡게 된 것들은 이른바 프랑스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이론들, 명사적 요소론에 입각한 정태주의의 사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 등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우량 문화가 자생할 힘을 잃게 된 까닭은 한마디로 부실기업 식의 거짓된 문화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상기한 사상과 문화에서 부분적으로 긍정적 요소를 찾아내어, 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들 역시 주어진 현실과 관련하여 조금씩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식 자본주의의 껍질 문화는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은폐시키지는 못한다.)  거짓된 껍질 문화들은 이번에도 동시 다발적으로 동양의..

45 동독문학 2022.06.09

서로박: 동독 문학 연구의 필요성과 한계 (1)

아래의 글은 나의 저서 "떠난 꿈 남은 글" (한마당 1999)의 서문으로 발표된 바 있다.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은 시대정신이 20년 전과 변함이 없다는 것은 반증한다. 1.고인 물은 으레 썩게 마련이다. 이는 작게는 나 자신에게, 크게는 어떤 특정한 문화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단 거창한 것부터 먼저 언급할까 한다. 원래 문화란 외부적으로 이질적 문화와 뒤섞이지 않거나, 내부적으로 생동하지 않을 때 반드시 정체되어 썩어버린다. 학문이나 문화는 비유적으로 말해 -동일한 우량종자의 씨 내림과는 달리- 가급적이면 잡 교배를 통해서 발전, 수정 그리고 보완된다. (인맥, 학맥 등을 따지는, 이른바 자화자찬 식의 섹트주의 내지는 학문적 근친상간 행위야말로 문화 발전에 대한 악재가 아닐 수 없다.) ..

45 동독문학 2022.06.09

서로박: 프리스의 '비행선' (2)

(앞에서 계속됩니다.) 친애하는 F, 소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요? 물론 소설의 줄거리를 일직선적으로 이어나가는 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특히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은 다양한 소설의 관점입니다. 소설의 관점은 세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폴로니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그의 구체적 삶을 서술합니다. 이를테면 슈탄네바인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라든가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그미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폴로니아가 보수적 시민주의 내지 소시민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슈탄네바인에 대한 그미의 시각은 온건하고, 우호적입니다. 이에 반해서 손자인 소설적 화자인 치코는 할아버지의 어정쩡한 정치적 태도를 비판적으로 논평합니다. 슈탄네바인은 비정치적인, 아..

45 동독문학 2022.06.05

서로박: 프리스의 '비행선' (1)

친애하는 F,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 (1935 - 2014)의 『비행선 Das Luftschiff』은 이전의 발표된 작품,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 Der Weg nach Oobladooh』과는 달리 동서독에서 공히 197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비행선을 소재로 한 작품은 주로 20세기 이후 생텍쥐페리의 일련의 소설 외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독일문학 작품에서는 거의 드문 소재인데, 프리스가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텍쥐페리의 소설과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의 『비행선』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리라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전자가 모성과 이에 대한 일탈이라는 심리학적 관점의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면, 후자는 시민주의 사회의 부자유와 이에 대한 일탈 욕구라는 ..

45 동독문학 2022.06.05

서로박: 제거스의 '결투' 뮐러의 '볼로콜람스커 국도 III' (1)

1. 망각될 수 없는 명작, 볼로콜람스커 국도 III: 친애하는 J, 오늘은 하이너 뮐러의 「볼로코람스커 국도 III」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85년 그리고 86년 사이에 발표된 것으로서, 도합 다섯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려는 뮐러의 세 번째 작품에는 “결투 das Duell”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뮐러가 처한 현실적 정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설가 안나 제거스 (1900 - 1983)의 단편 「결투 Das Duell」를 원전으로 하여 집필된 것입니다. 작품의 핵심사항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우선 그미의 단편집, 『약한 자들의 지략 List der Schwachen』에 실려 있는 결투의 내용을 자세하게 ..

45 동독문학 2022.05.21

서로박: 제거스의 '결투' 뮐러의 '볼로콜람스커 국도 III' (2)

(앞에서 계속됩니다.) 5. 안나 제거스의 창작 의도, 숨어 있는 영웅 발굴하기: 안나 제거스는 이 단편을 통해 두 가지 사항을 분명히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빈프리트와 같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던 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과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밝혀지지 않은 영웅을 찾아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작가는 뵈트허와 같은 나치에 저항하고, 약자를 돕던 자들의 희생정신 내지는 숨은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뵈트허 교수는 나치로부터 핍박당하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꺾지 않은 우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 헬비히가 생각하는 뵈트허 교수는 사회주의의 재건의 시대에도 일신의 편안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학교를 위한 개혁 운동에 헌신적으..

45 동독문학 2022.05.21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5)

18. 주변 인물들과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 (1): 클라우디아가 분열된 이중적 자아를 지닌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까닭은 그미가 구동독이라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고 애틋한 사랑의 삶에 관한 어떠한 구체적 사항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동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내세우면서 평등한 삶을 추구해 왔지만, 사회 심리적 측면에서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을 추구하려는 남녀들을 전혀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방해해 왔습니다. 오로지 여성에게만 금욕과 순결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자기기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가해 왔습니다. 다른 한편 레닌과 같은 권력을 지닌 남자들은 모든 창녀들을 달콤한 마돈나라고 아름답게 포장하곤 하였습니다. 이에 관해서 클라라 체트..

45 동독문학 2022.05.20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4)

15. 분열된 이중 자아의 원인 (2)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구동독의 이데올로기: 둘째로 클라우디아가 성격 갑옷을 착용하면서 분열된 이중 구조의 성격을 드러내는 까닭은 구동독의 가부장적 금욕주의 뿐 아니라, 여성 학대라는 사회적 경향 때문입니다. 1953년 6월 17일 구동독에서 동베를린 노동자 데모가 끝났을 때 지배 계층은 다음과 같은 강령을 모든 학교에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과 성은 하나의 타부, 즉 금기 사항이라고 말입니다.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은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여성의 성을 차지하고 학대하는 가부장들의 성폭력밖에 없다는 말을 뜻합니다. 가부장적 성폭력은 오랫동안 구동독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

45 동독문학 2022.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