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5)

필자 (匹子) 2020. 9. 8. 18:42

화가는 당혹스러운 감정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미의 놀라운 말들이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화가는 사랑의 유희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정이 지나치고 다음 날이 온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일순간 들판 위에서 돌풍이 일었다. 희미한 달빛은 창백하게 유동하는 안개 속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멀리 마을 회관의 창문에서 자그마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즐거운 바람은 관현악의 힘찬 음과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어쩌면 게르트루트는 그곳 문 앞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미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다시 오래된 교회의 탑으로부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바람과 부딪치며, 더욱더 격렬한 굉음으로 퍼지고 있었다. 갑자기 격렬한 폭풍이 화가의 몸을 밀쳤다. 바람은 그의 몸이 둥근 장벽으로 날려서 거기 부딪치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강풍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몸을 수그려야 했다. 바람은 순간적이었지만 너무나 막강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화가는 장벽 근처에서 일어나 마을로 향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주위에는 늪지대가 많고, 어두운 밤에 길을 찾는 게 몹시 힘이 들었다. 도처에 오리나무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화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을로부터 퍼지던 빛은 서서히 꺼지고 말았다. 어설프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화가는 빽빽한 수풀 사이를 헤매야 했다. 두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면서 늪지의 어둠을 벗어나, 원래의 길로 다시 되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전에 걸었던 걸어온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길은 어떤 비밀스러운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길을 잃는 게 아닐까? 이 순간 커다란 두려움이 화가의 마음속으로 엄습하고 있었다. 차라리 높은 곳에 머물면서, 교회 첨탑으로부터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방향을 설정하고 그리로 걸어가면 족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화가는 자정 이후로 더 이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지속적으로 부는 바람이 종소리를 다른 곳으로 흘려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순간 화가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거친 바람 소리가 지속적으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이윽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동이 틀 무렵 화가는 정신을 차렸다. 잠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개 한 마리가 그 앞에서 출몰했다. 관목 사이로 어떤 늙은 사냥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정말 다행이로군요.”하고 화가는 소리쳤다. 그의 말은 기쁨으로 인해 격앙되어 있었다. “당신을 만나 정말 다행입니다.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고 다녔어요. 게르멜스하우젠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내게 알려주시겠습니까?” 늙은 사냥꾼은 황급히 멈칫거렸다. 순간적으로 심자가를 그으면서 그는 말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대는 어디 출신의 사람이오?

 

늙은 사냥꾼은 화가를 멀거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나는 그 길을 잘 아오. 그런데 그대가 찾는 마을이 지상의 몇 평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겠소. 오로지 신만이 알고 계시니까. 그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오.” 이른 아침이지만 늙은 사냥꾼은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아보였다.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화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하루 전에 스케치한 바 있는 교회 탑이 그려져 있었다. 기이하게도 늙은 사냥꾼은 교회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정색을 하면서 화가를 뚜렷이 쳐다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는 화가를 낯선 방랑자, 혹은 유령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화가 양반”하고 사냥꾼은 말했다. “그대는 무언가를 듣고 꿈을 꾸었소. 밤에 길을 잃어서 정처 없이 헤매게 되면,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법이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더 이상 저주받은 지역의 이름을 내뱉지 마시오. 죽은 사람이 편하게 휴식하도록 그냥 내버려둡시다. 망자가 이승에서 불편하게 살았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환영으로 출몰한다오.” 늙은 사냥꾼은 자신의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말을 이었다.

 

도처에서 오래된 이야기들이 회자되곤 하오, 그대는 저편에 음습한 늪지를 보았지요? 말하자면 망자들이 그곳에 어떤 죽음의 덫을 설치해 놓았소. 누가,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곳에 빠져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오. 그래서 온갖 전설이 이리저리 회자된다오. 100년에 단 한 번 어느 날 어떤 무엇이 늪지에서 속출한다는 전설 말이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애타게 바란다오. 그렇지만 그대는 기이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소. 저기 저쪽으로 가면 딜슈테트라는 마을이 나올 것이오. 시골길을 따라 가보세요. 그곳에서 잠시라도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동행해줄 수 있소, 내 목적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거든.”

 

바로 이 순간 화가는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사냥꾼은 그를 바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화가는 사냥꾼을 밀치더니,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눈을 떴을 때, 화가는 혼자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늙은 사냥꾼은 망자의 기운을 느끼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다음에 황급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주위에는 자신이 최근에 스케치한 화지들만 흩어져 있었다. 화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주어 담았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의 작품에서 놀라운 광경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그림 속에는 기이한 종소리를 내던 교회의 첨탑 그리고 게르트루트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밝은 자작나무 숲 사이에 위치한 갈림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게르트루트는 바로 이곳에서 화환을 만들고 있지 않았던가? 갈림길에서 화가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눈에서 커다란 밝은 눈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의 말이 그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왔다. “부디 잘 살아, 사랑하는 게르트루트.”

 

출전: Ernst Bloch: Spuren, Frankfurt a. M. 1985, S. 72 - 78.

번역: 서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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