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1)

필자 (匹子) 2020. 9. 8. 10:44

어느 젊은 화가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미 오래 전에 스친 기억을 떠올리고 공허한 과거의 지평을 추적해나간다. 과거의 지평 속에는 화가가 겪은 모든 체험이 정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처녀에 대한 연정은 그에게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미에 대한 사랑은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치 맨 처음 부끄럽게 만개하려 하다가 그만 시들어버린 꽃봉오리와 같은 무엇이었다. 아마 이보다도 더 아름다운 이별의 이야기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래, 화가는 아름다운 이별을 정확히 서술하면서 우울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심리적 상처로 인해 마음 아파한다. 그렇지만 그의 갈망은 절반 정도 충족되어 이후에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화가는 신선한 기운을 지닌 채 어디론가 혼자 여행을 떠난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은 눈앞에 전개되었으며, 에술적 감흥을 느끼게 할 정도로 폭넓은 장관을 안겨주었다.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교회의 첨탑들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낯선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이는 길을 꺾어 자작나무 숲으로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자작나무 숲의 갈림길에는 놀랍게도 시골 처녀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미는 늦게 핀 꽃들을 차례로 묶어 자그마한 화환을 만들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발걸음을 엿들은 처녀는 놀란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화가에게 달려왔다. 처녀의 청순한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화가를 바라본 다음에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처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이 아니군요.” 화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처녀를 응시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으려고 했을 때 처녀는 다시 말했다. 그미의 목소리는 슬픔 반 두려움 반으로 뒤섞여 있었다. “하인리히가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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