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끝날 무렵에 촌장은 직접 담구어 절반 정도 발효시킨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이때 어느 농촌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게르멜스하우젠의 즐거운 삶에 관한 노래였다. 촌장이 관악기 하나를 가지고 와서 연주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를 외치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가는 게르트루트에게 춤을 청했다. 처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방의 이곳저곳을 춤 추면서 돌아다녔다. 화가는 처녀의 우아함과 미모에 거의 넋이 나가 있었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거대한 행복감에 이리저리 이끌리고 있었다.
게르트루트는 화가를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촌장은 사람들의 춤을 중단시키고, 창밖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마침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개 숙인 채 걷고 있었다. 남자들은 양측에서 꽃상여를 들고 있었고, 촛불 든 사람들이 상여의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나이든 여자와 처녀가 아마도 상주인 것 같았다. 장례 행렬은 참으로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검은 상복, 촛불, 주위를 노란 잿빛으로 비추는 태양, 아무런 위안도 슬픔도 없는 장례 행렬은 기이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몇 시간 전에, 그러니까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화가는 낮은 교회 탑을 스케치한 적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화구를 끄집어내어 나뭇잎 아래에서 사멸해가는 거리의 행렬 또한 간략히 그림 속에 담아보기로 했던 것이다. 스케치의 과정 속에서 게르트루트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미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은 삶과 죽음 사이의 기묘함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스케치가 끝난 뒤에 화가는 새로운 화지를 꺼내어 처녀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 이때 게르트루트는 화가의 작업을 중단시키면서, 화가의 팔을 살며시 붙잡았다.
“내 모습을 그리려고 하세요?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새로운 화지에 그리지 말고, 이전 그림 속에 나의 모습을 조금 채워주세요. 그림 속에는 빈자리가 있지 않나요? 아무도 없는 그림 속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기 싫거든요. 나 자신이 진지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어느 누구도 그림을 보면서 어떤 사악한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 화가는 정색을 하면서 처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게르트루트의 면모는 장례 행렬 위에 드러나고 있었다. 처녀의 면모는 암울한 세상의 고통스러운 광채를 받는 마돈나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
화가는 그림의 에스키스를 완성한 다음에 오래된 마을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길을 안내해달라고 게르트루트에게 부탁했다. 오후 무렵이라 햇빛은 비스듬히 내려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 돌아다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녁에는 춤과 파티가 개최되므로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고 촌장이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넓은 시골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정오의 시기에 마을은 떠들썩했다. 아이들은 집 앞에서 뛰놀고 있었다. 여인들은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아이들의 편안한 유희를 그냥 관망하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없었더라면, 마을의 분위기는 온통 평화롭고 안온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게 틀림없으리라.
저녁에 가까이 다가오자 마을에는 잿빛 안개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게르트루트와 화가는 천천히 능선의 비탈길로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높은 언덕에 도달하자, 평화로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장관으로 두 사람의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마을은 광활한 묘지 사이에 마치 고립된 섬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이 순간 화가의 눈에 띈 것은 고대 유형의 나직한 교회 첨탑이었다. 교회의 첨탑은 험상궂게 찢겨진, 둥근 장벽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위에 옹기종기 널린 무덤 앞의 비석들은 황량하게 비쳤고, 대부분 이끼로 덮여 있었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달리 새롭게 터를 잡은 깨끗한 무덤 그리고 비석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장례식을 치른 망자의 무덤임에 들림 없었다. 그 외의 다른 망자들은 오래 전에 버림받은 묘지에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망자들은 이제 속세의 갈망을 떨치고 고적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가는 이렇게 조용하고 황량한 묘지를 이전에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화가는 묘지를 돌아다니면서, 비석에 새겨진 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읽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비명의 글은 마치 암호처럼 어떠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화가는 비석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게르트루트는 화가의 곁에서 말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는 연거푸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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