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조립공은 “진실로 말하건대” 자신이 백작의 후예라고 술회했다. 아니, 자신이 미라보 백작의 후예라고 거의 맹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확인하기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남자가 지옥, 혹은 천국으로 향하기로 되어 있는, 결코 사멸되지 않는 영혼을 지녔다든가, 어느 하녀가 부엌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든가, 기계 조립공이 자신을 물화시켜 바라본다든가 하는 일밖에 없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긴다. 까놓고 말해서 매일 아침, 온갖 수수께끼로 가득 찬 신문기사, 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업무 등은 얼마나 진실과 거리감을 지니고 있는가?
일상적으로 주어진 질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까? 주어진 현실 속에는 우리의 시간이 없고, 우리의 공간도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초인종이 울리자 잠에서 깨어나는 자는 추호도 우리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내의 뇌리에는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기계 조립공의 하루가 모든 사회적 일깨움의 역사를 규정한다는 말은 그 자체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기계조립공, 에밀 비첼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진부하게 자신보다 더 높은 사회 계층 사람들을 속여 왔다. 어쩌면 타인을 기만한다는 점에서 고트프리트 켈러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재단사 시다로 일하는 슈트라핀스키의 형제일 수 있다. 주인공, 벤첼 슈트라핀스키는 재단 기술을 비우는,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이지만, 다른 도시에 가서 자신이 만든 고급 망토를 걸치고, 살롱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폴란드 출신의 백작이라고 소개한다. 슈트라핀스키의 우수 어린 푸른 눈동자 그리고 고결한 표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선남선녀는 거의 없다. 그는 외모만 멋진 게 아니라, 순수하고, 고결하며 훌륭한 품위 또한 간직하고 있다.
기계조립공 비첼의 경우 세상을 기만하는 자가 거짓된 미라보 백작이라면, 재단사 시다 슈트라핀스키의 경우 주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현혹시키는 자는 다름 아니라 거짓된 슈트라핀스키 백작 자신이다. 두 사람은 한마디로 꿈속의 백작들로서 귀족의 신분을 활용하여 상징적 의미에서 이타주의의 삶을 실천한다. 어쩌면 꿈의 백작은 가난한 두 사람이 결코 기계조립공이라든가 재단사 시다와 같은 낮은 계층의 직업에 국한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주위 사람들을 속이는 그들의 행위는 그저 피상적으로 사기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록 유아적이고 경박하지만 기이한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즉 현실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가식적 허영 그리고 대부분 인간이 모멸감을 느끼는 굴욕이 얼마나 치욕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것들이 수정될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이 바로 그러한 핵심일 것이다.
마치 강도 한 사람이 아이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듯이, 그들의 목소리는 찬란한 외투 속에서 거의 질식되고 있다. 이는 그들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이제 그들은 평범한 기계조립공 내지 재단사 시다의 정체를 벗지 못한다. 비참한 몰골로 지나치던 남자는 자본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저리 일회용으로 끌려 다니는 상품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에밀 비첼은 처음부터 백작의 타이틀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동화적인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갈망은 빛을 추구하지만, 순식간에 꺼지는, 인간의 마지막 밝혀지지 않은 무엇에 관한 상으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동화적 갈망은 으레 상징물을 필요로 한다. 베첼의 경우 그것은 기상천외한 열망으로 드러나는 반면, 일반 사람의 경우에는 아마 어둡고도 심원한 충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타자의 면모를 지닌 이러한 충동은 어쩌면 진정한 무엇일지 모른다. 상징은 일반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충동과 우연히 일치될 수 있다. 더 높은 계층으로 향하려는 욕구, 그것은 자기 소모적인 특성을 지닐 뿐이다. 사회 내에서 아직도 진정한 존재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이 분출될 수밖에 없다.
사내는 젊은 시절 무명의 음악가였던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은 어느 순간 자신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재능을 발견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이때 그는 기이한 방식의 속임수에다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켰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차제에는 반드시 음악의 대가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던 것이다. 악성이 되겠다는 결코 은폐될 수 없는 욕망이 바로 여기서 과감하게 활용된 셈이다. 이는 미래의 자신에 관한 베토벤의 참으로 대담하고 오만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상이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에밀 비첼에게는 자신을 미라보 백작이라고 명명할 하등의 권한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흔히 부활절 축제 때 우연히 얻게 된 달걀 앞에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비첼이 비록 천박한 기계 수리공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진정한 미라보 백작은 자신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진정한 베토벤은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물려받는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불교 신자처럼 이러한 행운이 이전의 삶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데 명성과 재능은 오로지 몇몇 특정한 사람에게 이전될 뿐,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다른 사람에게 비켜 지나간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예술가, 심지어 경건한 사람들은 여러 유형의 행운을 갈구하지만, 그게 당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젊은 시절에 일찍 주어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속임수로 행운을 차지할corrigier la fortune”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만일 만인이 사회적 행복을 평등하게 즐기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작은 사내가 품은 수수께끼라든가, 위대한 남자의 기적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가 피곤한 몸으로 차단시키는 사기술의 “근원”은 학문적으로도 완전히 밝힐 필요가 없을 것이며, 어쩌면 하루의 삶 속에서 망각되어 그냥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주위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는 어떤 매우 기이한 특성으로 남아 있다. 그래, 사기술은 만인이 갈구하고 만인이 기대하는 광채를 보여준다. 거짓을 다룬 동화들은 행운을 찾아다니는 수많은 기사 (騎士)를 내용으로 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동화는 실제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용서를 구하곤 한다. 왜냐하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동화 속에서 스스로 왕자와 공주라고 꿈을 꾸며, 자신의 미래의 화폭에 멋진 그림을 그리곤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인간은 진실로 천국에 살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그에 관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래, 천국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여전히 아주 불명료하게 의식될 뿐이다. 만약 인용문에서 “그에 관한 아무 것도”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그 자리에 “그리로 향한 자신의 의지를”이라는 표현을 첨가시키면, 그 문장은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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