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가난한 놈과 부유한 놈

필자 (匹子) 2022. 6. 19. 11:24

부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유희를 즐기려고 하며, 함께 즐기자고 가난한 사람들을 종용한다. 어느 미국인은 무척 기이한 내기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행동을 취했다. 이때 그는 함께 세계 여행을 즐길 젊은 사내 한 명을 공개적으로 채용하려고 했다. 가급적이면 건강하고, 민첩한 광부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려 했다. 지원자는 놀랍게도 10만 명이나 되었다. 지원자 가운데 젊은 사내 한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매우 잘생긴 청년이었다. 채용 조건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즉 사내는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게 먹고 마시고, 세련된 의복을 멋지게 걸치며, 자신의 몸매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가정교사 한 사람이 채용된 사내에게 세상의 법도를 가르쳤다. 가령 승마, 골프, 숙녀 앞에서 행해야 하는 교양 넘치는 말씨 그리고 그밖에 미국의 젠틀맨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이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모든 비용은 미국인 주인에 의해 지불되었다. 모든 수업 과정을 끝낸 행운아는 3년 동안의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모든 이국적인 갈망을 만끽할 수 있는 위탁 신용증권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 여행을 즐기는 대신에 사내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3년의 세계 여행을 마친 다음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광산으로 돌아가서 10년 동안 지금처럼 광부의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행운아는 이러한 계약을 지키겠다고 서명한 다음에, 이를 충실히 지키려고 작심했다. 드디어 찬란한 청춘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내는 유럽에서 찬란한 광채 속에서 오페라의 아름다운 음을 즐겼다.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유혹하여 짜릿한 연애를 만끽했다. 인도에서 호랑이를 사냥할 때에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가는 나라마다 그곳의 왕과 함께 휘황찬란한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한마디로 사내는 온갖 서치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면서 마치 황태자와 같은 꿈같은 삶을 향유하였다.

 

드디어 3년이 지난 다음에 사내는 약속대로 귀국하여 자신에게 모든 비용을 대준 미국인을 찾았다. 지금까지 잘 살게 해준 후원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면서 작별했다. 그는 다시 과거에 입던 작업복을 걸치고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그렇지만 석탄더미, 눈 먼 말(馬)들 그리고 함께 일하던 광부들은 너무나 낯설게 보였다.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갱로 아래로 내려갔다.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광부의 작업은 지금까지 3년 동안 누리던 찬란한 삶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새벽 무렵 갱로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서 허리를 구부리고 힘들게 석탄을 캐야 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목에서 가래가 끓어, 기침이 나왔다. 눈 안으로 석탄 가루가 들어와서 도저히 앞을 바라볼 수 없었다. 누추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세 사람씩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사내는 도저히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더 이상 과거의 좋은 삶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편안한 다른 일자리를 찾고 싶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선동하는 혁명가로 활약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내는 놀랍게도 가장 강력한 방법을 택했다. 뉴욕으로 가서 자신의 후원자를 만났다. 그 다음에 그를 총으로 쏴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살인 이유를 접하게 되었고, 재판정은 기이하게도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무죄 선고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삶은 한마디로 미국인 남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물론 그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했으므로 젊은 노동자는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 부자가 가난한 계급에게 설정하는 사회적 운명은 파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부유한 남자는 마치 다른 사람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우리의 운명은 자연스럽게 마지막의 끔찍한 죽음으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부유한 악마는 죽음의 황량함을 복제하여, 가난한 노동자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해준 셈이다. 이전의 삶이 이전에는 비참하든, 생동감 넘칠 정도로 찬란했든 간에, 죽음은 어차피 생명의 불꽃을 끄게 하고 인간을 무덤으로 들어가게 한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의 전제군주는 전적으로 마지막 운명 속에서 생동하고 있다. 그가 쥐락펴락하는 운명은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데, 종국에 이르러 우리에게 어떤 공허함만을 선사할 뿐이다.

 

여기서 미국인 갑부는 우리가 운명을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전제 군주와 유사하다. 가령 칼뱅Calvin이 언급한 신을 생각해 보라. 언젠가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느 누구도 하늘 위의 신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신은 오로지 누군가 성스러운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은총 여부를 결정할 뿐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성스러움은 지상에서는 거의 인지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신은 마치 몇몇 사람들이 나중에 천국에서 거주하리라고 확신할 정도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성스러움의 면모를 감지하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칼뱅의 이러한 견해는 한마디로 착각일지 모른다. 하늘 위의 신은 오히려 바로 이러한 몇몇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배척하고 내쳐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때로는 몇몇으로 하여금 지옥에 나락하여 더욱 끔찍한 놀라움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성스러움을 감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칼뱅은 자기 자신이 천국의 특정한 장소에서 생동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칼뱅과 같은 성자는 천국에 머물고, 일반 사람들은 현세에서 지옥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합당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간은 언제나 삶이지만, 그래도 삶 이상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갈구하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건대 죽음이라는 쥐구멍 앞에는 언제나 부유한 고양이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다. 놈은 쥐 한 마리를 잡아먹기 전에 언제나 장난삼아 작은 동물로 하여금 이리저리 도망칠 기회를 제공한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어떠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마치 노동자가 백만장자에게 가한 바 있듯이- 신을 쏴 죽이는 “성자”를 감히 탓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판결을 실제 현실 어디서도 들어본 바 없으며, 살인자를 무죄로 방면하는 재판정을 직접적으로 접하지 못할 것이다. 거대한 고양이는 실제 삶에서 기껏해야 지엽적으로 손님이라는 작은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총을 발사해야 하는 노동자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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