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2)

필자 (匹子) 2020. 8. 27. 11:17

2. 음각과 그림자 속에 도사린 여백의 만화경

너: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라는 표현이 흥미롭군요.

 

나: 시인의 작품 속에는 과거의 찬란한, 혹은 끔찍한 기억으로서의 상이라든가 갈구하는 삶에 대한 갈망의 상이 현재 현실에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정주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일단 작품들을 여러 번 정독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의 시를 자구적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시적 현실 속에 담긴 배후의 상, 다시 말해서 기억과 갈망의 상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시작품 속에 활용된 시어들에 집착하지 말고, 그 속의 여백을 고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만약 겉으로 드러난 시적 표현의 양각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음각의 상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이정주의 시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상적 표현만을 대하지 말고, 표현의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여백 속의 어떤 암호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너: 음각의 상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탈리아의 위대한 조각가는 자신의 조각 작품에 관해서 “나는 돌 속의 불필요한 부분을 때내었을 뿐이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설마 이정주 시인이 자신의 시를 불필요한 조각이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나: 조각가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정주 시인의 시어들은 “불필요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존재의 껍질, 내지 갈망하는 삶의 허구적 표피”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비근한 예를 들겠습니다. 언젠가 함석헌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상자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에 칼질했을 뿐이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지요? 그는 어떤 바람직한, 그러나 쉽사리 이룰 수 없는 사회를 종교적으로 갈구하면서,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이정주 시인의 시구들은 “비정한 현실의 대팻날에 의해 찢겨나간 마음의 대팻밥”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온갖 뼈저린 고통의 역정을 달려온 자만이 삶의 깊은 맛을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정주 시의 대팻밥은 무조건 슬프고 괴로운 게 아니라,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슬픔과 괴로움은 시적 아이러니로 여과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이정주의 시는 “음각과 그림자 속에 도사린 여백의 만화경”이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물론 만화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에 관해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중요하게 고찰해야 하는 것은 시인의 시적 관점의 변화 그리고 시적 표현의 배후에 남아 있는 여백의 상 등입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이를테면 자구적 독해 방식 외에도 심리적 내지는 영혼의 독해 방식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