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집니다.)
16. 전인적 삶에 대한 동경, 역사에 대한 외면: 아름다운 미래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윌리엄 게스트는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새로운 사항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이들은 성심성의껏 질문에 대답해줍니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것보다는 전인적인 삶을 더 좋게 생각합니다. 등장인물 딕은 수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 봅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즉 야외 노동을 하여, 머릿속의 거미줄을 모조리 걷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항은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생업에 몰두하고, 역사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동시에 비판적 역사의식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어쩌면 22세기 런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위험의 요인으로 작용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사람들은 지나간 역사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윌리엄은 역사학자, 해먼드를 만나려고 영국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17. 역사학자 해먼드와의 대화: 해먼드와의 대화는 비교적 오래 지속됩니다. 해먼드는 언젠가 루소가 표방한 바 있는 공동체 내의 원칙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가령 죄악을 처벌하고 금지시키는 엄격한 정책 대신에 선을 권장하는 사랑의 정책이 바로 그 원칙입니다. 뒤이어 해먼드는「어떻게 변화가 도래했는가?」라는 핵심적인 장에서 지나간 역사적 진행 과정을 쉽게 설명해줍니다. 이는 착취자와 착취당하는 자 사이의 계급투쟁의 역사가 어떻게 피비린내 나는 혁명으로 이전되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됩니다. 물론 과도기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 사건만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혁명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많은 기계들을 파괴했다는 사실입니다. 해먼드는 무작정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윌리엄에게 간간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려 깊은 숙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도입되는 것도 무척 놀랍습니다. 가령 대화에서 문제점이라든가 의혹이 발생하면, 해먼드는 방문객인 윌리엄 게스트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여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18. 학교는 없다: 주인공은 미래 사회의 교육 제도에 관해 딕에게 학교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딕은 “학교”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체제로서의 학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학교라는 단어 역시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체제로서의 교육 시스템은 완전히 철폐되고, 아이들은 자신이 필요한 내용을 자발적으로 배워나갑니다. 요리하기, 나무로 물건 제작하는 일, 상정 운영하기 등이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만 4세가 되면 읽기와 쓰기를 배웁니다. 학교가 없으므로 교육 내지 교육 시스템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쓰기에 관하여 선생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언가 쓰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렇게 해야만 지저분한 글씨체에 적응하게 된다고 합니다. (Morris: 62). 아이들은 외국어 역시 독학해야 합니다. 영어, 웰스와 아일랜드 사투리 외에도 독일어, 프랑스어를 배우며, 당사자가 원할 경우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배울 수 있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능력을 권위적 척도에 의해 상대적으로 비교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20. 템스 강변의 보트 여행, 과거로의 회귀: 윌리엄은 박물관을 나와서 템스 강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몇몇 이웃 사람들과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에 동승합니다. 템스 강은 매우 깨끗하게 변하여, 연어 떼가 알을 낳으러 퍼덕거리며 상류로 헤엄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모리스의 유년 시대로 향하는 자전적 여행기를 방불케 합니다. 윌리엄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보트 여행을 통하여 어떤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과거의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이들과 영원히 살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슬픈 감정에 빠져듭니다. 윌리엄은 어느 교회에서 개최되는, 수확을 찬양하는 세속적 만찬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시름에 잠긴 채 그는 혼자 템스 강변을 걷습니다. 이때 검은 구름이 출현하여 그를 감쌉니다. 구름은 마치 유년시절에 접했던 끔찍한 악몽과도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윌리엄은 자신이 더러운 산업의 시대인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서성거리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21. 중세의 전원적 삶: 모리스는 수공업의 모델을 강조하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전원적인 삶을 사회주의 이론과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중세를 동경하는 영국 낭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려 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존 러스킨의 예술 비평서,『베네치아의 돌The Stones of Venice』(1851 – 1853)에 실려 있는 예술 비판을 연상시킵니다. (Jens 11: 1004). 러스킨의 작품 가운데 「고딕의 자연」이라는 장에서는 중세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삶이 하나의 이상으로 묘사되는데, 모리스는 아마도 친구의 저서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밖에 모리스는 정치적으로 마르크스, 샤를 푸리에, 로버트 오언 그리고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표도로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모리스에게는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사회는 참으로 저열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관계를 돈으로 물화시키고, 타인을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적인 모델은 삶의 포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으며, 인간의 본성에 관한 모리스의 낙관론적인 견해는 루소의 그것과 매우 근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2. 사유 재산제도 철폐, 경찰의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 시장의 철폐, 즐거운 노동: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실용 사회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모리스는 거대한 시스템으로서의 기계 산업의 구조를 지양하고, 소규모의 농업 내지 수공업을 통한 자급자족의 경제구도를 설파하였습니다. (오봉희: 58). 여기서 국가는 경찰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축소화되어 있고, 사유재산 제도는 철폐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상품을 생산하여 이윤을 추구하려는 욕망 역시 자리할 리 만무합니다. 이곳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사람들은 공동작업장에서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 수공예 제품들을 생산하며, 장조적인 열정으로 제각기 맡은 노동에 몰두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리스는 노동의 미학적 형식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형식은 즐거운 노동을 강조한 샤를 푸리에의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노동이 즐겁기 때문에, 지루함을 오히려 질병으로 간주할 정도입니다. 사실 일시적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마치 배탈 난 사람이 설사약을 복용하듯이 금방 일터로 복귀합니다. (Morris 57, 모리스: 82쪽).
23. 부분적으로 활용되는 과학 기술: 모리스는 새뮤얼 버틀러의 경우처럼 기계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기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미학적 관점을 극대화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그릇 제품이든가, 유리 제품의 경우 폭넓은 범위에서 기계 공장이 예외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제 24장에는 건축을 위한 크레인 그리고 화물 운반을 위한 특수차 등이 예외적으로 활용됩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항은 모리스가 최상의 과학 기술을 활용한 열 난로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우 열 난로에서는 어떠한 유독 연기가 배출되지 않습니다. (Morris: 19).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노동은 손으로 행하기 힘든 경우에 있어서는 기계에 의해 수행되고, 손으로 행해지는 모든 노동은 그 자체 즐거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기계에 의해 세밀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Morris 126). 한마디로 과학 기술은 자연의 생명체를 파괴하지 않고,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24. 오래된 아름다움, 모리스의 수공예 예술: 모리스의 경우 멋진 수공예 작품은 예술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노동 전반과 관련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중세로부터 이어진 수공예 예술로서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삶의 기쁨,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는 예술입니다. (Vallance: 32). 모리스는 회화 예술을 “소 예술”과 “대 예술”로 구분하였습니다. 소 예술은 집, 도장, 목공, 유리 제조, 직물, 카페트, 가구, 옷, 주방용품 등을 창조하는 일이며, 대 예술은 회화, 조각 그리고 건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모리스는 인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 예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어쩌면 생활에 접목되는 예술이야 말로 모든 예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예성: 96). 이를테면 수공예 제품의 제조는 인간에게 소박한 즐거움을 안겨주며 위안을 가져다주는 일감으로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창의적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25. 모리스의 소규모 사회주의 공동체, 남녀평등의 유토피아: 모리스의 미래 국가에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강제적 권력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로 적용되는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없으므로 의회 또한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행정 기관은 존재합니다. 정치 행정 시스템은 지방분권화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안은 자치 구역에서 충분히 논의되므로, 정책 결정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때 견해 차이로 인한 다수와 소수는 얼마든지 출현 가능합니다. 이 경우 소수는 세 번에 한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수는 소수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하여 하나의 안을 채택하여 결정합니다.
모리스의 미래 국가에서는 법 규정이 없습니다. 국가는 무정부주의적 특성을 표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형법에 저촉되어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감옥과 법정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화된 정부, 군대, 군함 그리고 경찰 조직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모리스의 유토피아에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갈등은 주로 기술상의 문제에 있어서 나타나는 의견 대립이 태반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거대한 사회적 이슈로 인한 대립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정당이 필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리스는 남녀평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마찬가지로 여자들 역시 남자들을 억압할 아무런 계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여자들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하며, 이에 대해 남자들이 어떠한 질투심을 느껴서도 안 되고, 화를 내어서도 안 된다.” (Morris: 100).
26. 사랑과 결혼: 국가는 개개인의 사랑과 결혼 문제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리스가 일부일처제를 중시하는가, 아니면 플라톤과 캄파넬라의 여성 공동체를 중시하는가? 하는 물음은 무의미합니다. 결혼이란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는 가족을 구성하려는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결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결혼이 국가에 의해서 제도화된 계약 관계가 아니므로, 이혼 역시 그야말로 진부한 일일 뿐입니다. (Morris: 89). 사랑의 열기가 사라지면, 남녀는 법적 이혼이라는 절차 없이 그냥 헤어집니다. 모리스의 이상 사회에서는 에로틱한 열정은 예술적으로 표현됩니다. 예컨대 미래의 런던사람들은 두 남자와 한 여자, 혹은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애정의 삼각관계 속에서 어떻게 질투심을 극복하는가?“ 하는 극작품을 즐겨 관람합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억압하고 구속할 하등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므로, 남자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애인의 배신에 대해 막무가내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27. 여성의 일감은 부분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모리스는 여성이 전통적으로 행하던 일감, 가령 가사와 육아를 긍정적으로 언급합니다. 집안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사람들은 가사노동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치장된 공공 식당에서 하루 한 번 식사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요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모리스는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에서의 삶의 방식을 진부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19세기 초반부 유럽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푸리에의 공동체가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도피처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 과학기술이 발전된 19세기 후반부의 삶의 공간에서는 굳이 폐쇄적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Morris: 100). 그렇다고 모리스의 유토피아가 개인화된 거주 공간만 예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개인적으로 고답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건물에서 거주하지만, 낮에는 대문이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 활짝 열려 있습니다.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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