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8. 서로 만나는 여인들은 내심 외로움에 젖어 있다. 1949년에 간행된 세 번째 작품, 『고독한 여인들 Tra donne sole』은 자연과 신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나”는 토리노에 생활하는 여자, “클레리아”입니다. 그미는 평범하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패션 업계에 발을 들여서 로마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본사는 클레리아에게 한 가지 임무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그미가 고향 토리노에서 패션 지사를 창립하여 운영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클레리아는 이 제안을 수락하면서, 16년 동안의 외지 생활을 접고, 토리노로 귀향합니다.
뒤이어 그미는 지인의 소개로 토리노의 많은 상류층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게 됩니다. 이들은 나중에 그의 고객이 될 것 같아서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클레리아가 만나는 여인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부유한 계층 사람들입니다. 가령 마리엘라는 자신만만한 타입으로 살롱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미는 고상한 말솜씨로 남자들을 매혹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곤 합니다. 그미 곁에는 모미나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미나는 말이 없고 모든 것을 냉철하게 행동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이들은 살롱에서 어울리면서 수다를 떨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불행한 영혼들입니다.
9. 로제타의 자살: 클레리아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많은 사람과 틈나는 대로 만납니다. 가령 인테리어업자인 페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인공에게 구애의 제스처를 취합니다. 이때 그미는 공손하게 거부의 뜻을 밝힙니다. 클레리아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살롱의 차 모임에 참여하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예술가들을 접견하며, 주말이 되면 그들과 함께 소풍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수공업자 바쿠치오를 사귀게 됩니다. 클레리아는 데이트를 즐기다가 그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그미에게는 사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바쿠치오와의 관계를 가벼운 만남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주인공의 주위에는 슬픈 표정을 짓는 로제타라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클레리아는 어느 날 로제타와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합니다. 로제타는 한 번도 미소짓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실연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클레리아는 그미와 둘이서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로제타는 상당히 잘 사는 집안 출신이었는데, 최근에 어느 사내로부터 몸과 마음을 빼앗긴 다음 배신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클레리아는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새 출발을 제안합니다. 로제타는 이러한 제안에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패션 회사가 처음으로 창립하는 바로 그날 로제타는 안타깝게도 목숨을 끊고 맙니다.
9.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심리적 아픔 그리고 이로 인한 폭력: 클레리아는 평범한 가정 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신분 상승을 이룩한 예외적인 여성입니다. 그미는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주위의 상류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가령 그미는 주위 사람들을 질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들의 유약한 심성을 은근히 책망합니다. 주인공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자들이 심리적으로 가냘프게 무사안일주의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실제 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클레리아는 유행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환상에 내심 거부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유행을 쫓는그들의 감각에 맞장구를 칩니다. 여성들은 심리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간군들입니다.
가령 모미나는 평소에는 자신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미는 칼을 사용하여 순간적으로 친구 마니엘라를 찔러버립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정다감한 말씨를 지닌 살롱 주인에 대한 질투의 발로로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대한 혐오의 무의식적 반작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클레리아는 이러한 소동을 접하면서, 모미나의 칼부림이 자학의 앙갚음에 기인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질투와 교태에서 비롯한 분노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모미나의 행동은 주인공의 눈에는 로제타의 자살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로제타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어. 사랑의 배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의 혼란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언 이유에서 목숨을 끊었던 거야.”
10. 우리가 사는 곳은 탈출구 없는 공간일까? 클레리아 역시 혼자 있을 때 어떤 공허함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에게는 마치 고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날 그미는 자신이 자란 지역으로 찾아갑니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은 많이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는 산산 조각나고 맙니다. “그게 나의 과거였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향은 이제 죽은 채 사라지고 말았어.” 그렇지만 그미는 어떻게 해서든 내면의 공허함을 다른 무엇으로 메꿀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는 시간일 수 있으며,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는 어쩌면 이 대목에서 인간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출구 없는 공간이며, 뚜렷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지 모릅니다. 소설 속의 모든 사건은 신속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건과 주인공의 의식을 마치 자신의 일기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야기를 평이하게 전개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느낌과 사고 그리고 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여성인 “나”에 의해 서술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남성 작가가 여성인 “나”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경우는 무척 특이합니다. 그렇지만 파베세는 여성의 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여성들의 복함적 감정들을 자세히 풀어나가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파베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알 수 있었어요, 화자가 바로 가발을 쓰고 가슴에 뽕 브라자를 넣은 당신이라는 사실 말이지요.”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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