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언덕 위의 집: 고독을 추구하는 스테파노의 낯선 존재는 두 번째 작품 『언덕 위의 집La casa in collina』에서도 다시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47년에 완성되어 이듬해에 발표되었습니다. 소설의 시점은 1943년 초여름으로서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독일군이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의 중년 남자, 코라도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투린에 있는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거주하는 곳은 도시 외곽에 있는 어느 언덕의 집입니다. 이 집에는 두 명의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코라도가 도시를 떠나 생활하는 까닭은 전투기 폭격을 당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코라도는 오후에 틈만 나면 산책을 합니다. 산책길에서 코라도는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저녁 무렵에 식당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냅니다. 이때 코라도는 뜻밖에 과거에 사귀었던 임, 카테와 만납니다. 7년 전에 주인공은 그미와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 바 있었습니다. 다시금 가슴속에 깊이 감추어두었던 연정이 새록새록 솟아오릅니다. 뒤이어 코라도는 식객들과 규칙적으로 만나,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곤 합니다. 카테에게는 여섯 살 난 아들, 디노가 있습니다. 디노의 아버지는 주인공 코라도인데, 카테는 지금까지 이를 비밀로 했습니다. 코라도는 나중에 디노가 떠난 후에야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8. 국외자 코라도의 수수방관주의: 어느 날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리가 라디오 방송에서 울려 퍼집니다. 사람들은 조만간 평화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풉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전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을 때 사람들은 이탈리아가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도시를 지켜내고, 어떻게 해서든 독일군의 진군을 막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카테의 친구들은 각자 저항군으로 일하기 위해서 숨어 지내기로 작심합니다. 이를테면 언덕 위에 무기 창고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코라도는 불안감에 휩싸여 이러한 저항 운동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만약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저항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고독의 안온함이 깡그리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카테는 주인공의 소극적이고 수수방관의 태도를 신랄하게 질타합니다. 그령 그미는 코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지식인인 당신은 아는 게 많지만, 결코 우리를 돕지 않으려 하는군요.”
시간이 흐른 뒤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독일군들은 이곳의 무기 저장소를 발견하고, 카테 그리고 여러 명의 이탈리아 사내들을 체포하여, 어디론가 호송하게 됩니다. 코라도는 이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봅니다. 그렇지만 며칠 후에 독일군은 코라도에게도 혐의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이때 그는 디노와 함께 피신하에 인근의 수도원으로 몸을 숨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노는 주인공과 이별하며, 수도원을 떠납니다. 자신은 비록 어린 소년이지만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며, 할 수 있다면 저항 운동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 코라도는 폐허게 된 마을을 떠나서, 피몬트의 언덕으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는 이웃 사람들이 처절하게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멀거니 바라봅니다. 말하자면 그는 끝까지 나라와 이웃에 도움을 주지 않고, 국외자로서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면서 살아갑니다.
9. 정치 소설이 아니라, 심리 소설이다. 파베세의 소설, 『언덕 위의 집』은 어느 수수방관자의 내적인 양심 고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전쟁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떠한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는가? 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인공, 코라도의 반정치적인 도피행각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모든 도전과 사회적 참여를 거부하고 도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를테면 땅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 한 마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개인의 책임 내지는 참여를 거부하고, 오로지 유년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퇴행Regression” 내지는 보수 반동주의의 성향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타인의 눈에는 일견 몹시 비겁하게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유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리적 거부반응 내지는 자기변명으로 이해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품에서 언급되는 “언덕”이란 그 자체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태고의 안온함 그리고 이러한 평온이 어떻게 위협당하는가? 등을 암시하는 객관적 대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0.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해성사와 같다. 여기서 소개되는 두 편의 작품은 체자레 파베세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한 청산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두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고스란히 용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은 이렇듯 작가의 과거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쌍둥이 소설이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의 기법적 측면에서 두 작품은 서로 이질적 요소를 보여줍니다. 『유배』가 일인칭 소설로 서술되어 있다면, 『언덕 위의 집』은 3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첫 번째 작품에서는 –두 번째 작품과 비교할 때- 역사적 현실로부터 더욱 동떨어진 낯설고 생경한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언덕 위의 집』은 서술적 방식에 있어서 객관적인 정교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집 서두에 (마태오의 복음서 2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배반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자세를 그데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얼마나 시대의 요구에 불응하고 비겁하게 행동했는가에 대한 고백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형벌의 선언을 뜻합니다. 코라도는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연인, 카테와 자신의 아들, 디노를 위험에 빠뜨리게 했고, 사회적으로는 외세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지 않았던가요?
한국어판 파베세의 작품
-체자레 파베세: 당신의 고향, 김효정 역, 청미래 2007.
-체자레 파베세: 아름다운 여름, 2권, 김효정 역, 청미래 2007.
-체자레 파베세: 레우코와의 대화, 김운찬 역, 열린책들 2010.
-체자레 파베세:: (시집) 피곤한 노동, 김운찬 역, 문학동네 2014.
-체자레 파베세: (시집) 냉담의 시, 김운찬 역, 2014.
-체자레 파베세: 달과 불, 이현경 역,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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