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1) 체자리 파베세의 '아름다운 여름'

필자 (匹子) 2024. 12. 20. 11:04

1. 어찌 우리가 타자의 마음을 감히 들여다볼 수 있는가? 삶은 수많은 고통과 슬픔, 아쉬움과 상실의 감정을 간직하게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자기 자신의 직간접적인 체험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타자의 애환을 막연히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자레 파베세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소설 집필 시에 체험화법을 활용하고 모든 것을 일기 형식으로 서술하려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의 마음속에 넘실거리는 감정의 파도는 얼마나 격정적일까요? 그렇지만 행인은 내 곁을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오늘은 체자레 파베세의 장편소설 삼부작, 『아름다운 여름 La bella estate』을 다루려고 합니다. 이 작품집은 1949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책에는 『아름다운 여름』 외에도 『언덕 위의 악마Il diabolo sulle colline』, 그리고 『고독한 여인들 Tra donne sole』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세 편의 작품은 내용상으로는 서로 독립적인데,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를 배경으로 한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파베세는 1950년에 세 편의 장편소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세 편의 작품들은 삼부작이라고 명명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처하고 있는 도덕적인 분위기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갈등과 파괴의 조짐이 뒤섞여 있지요. 세 편의 작품에는 한마디로 도시 전체에 횡행하는 정조(情調)가 혼융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2. 지니아의 연애 경험: 첫 번째로 『아름다운 여름』 은 1940년에 완성된, 삼부작 가운데 가장 짧은 작품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16세 처녀, 지니아의 연애 경험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지니아는 토리노에서 재단사 보조로 일합니다. 어느 여름밤 그미는 함께 일하는 여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약간 나이 많은 아멜리아가 그미의 눈에 띕니다. 추측하건대 아멜리아는 다른 처녀들과는 달리 비밀스럽게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그미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어느 화가의 집에서 모델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멜리아는 나중에 아틀리에로 함께 가자고 지니아에게 권합니다. 그리하여 지니아는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과 서서히 사귀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귀도 그리고 로드리게스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로드리게스는 주인공의 눈에는 표리부동하고 음험하게 비칩니다. 그렇지만 귀도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서정적인 남자였습니다. 지니아는 귀도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귀도 역시 아무런 거리낌없이 지니아와 밤을 함께 지내곤 합니다.

 

3. 사랑의 강도와 사랑의 배신: 지니아와 귀도 사이의 연인관계는 몇 주 이어지지만, 어느 날 하나의 사건으로 깨어지고 맙니다. 어느 날 지니아는 아무 언질도 없이 귀도가 일하는 아틀리에를 급습합니다. 이때 모델로 일하는 여자가 발가벗은 채 귀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로드리게스가 커튼 뒤에서 두 사람이 애무하는 장면을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화가들은 대체로 미적 감정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동안에, 남녀 관계의 도덕적 장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엿보는 행위는 화가에게 중요합니다. 화가들을 감정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기이한 관음증과 관련되는지 모릅니다.

 

원래 작품의 제목이 “커튼La tenda”이었다가 “아름다운 여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지니아는 한편으로는 외설적 장면에 몹시 부끄러워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속에서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낍니다. 귀도는 아무런 사랑의 감정 없이 모델들과 거침없이 살을 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귀도에게 깊이 실망합니다. 이러한 인간을 신뢰하고 사랑한 자기 자신이 몹시 미웠습니다. 지니아는 귀도와 변함없는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귀도에게 중요한 것은 지니아라는 사랑하는 임이 아니라, 예술적 창조에 대한 욕구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성은 그에게는 부차적 사항일 뿐이었습니다. 지니아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작별을 고합니다.

 

4. “아름다운 여름”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체자레 파베세는 소설 기법 가운데 체험화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체험화법이란 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양상을 묘사하는 기법을 지칭하는데, 직접 화법과 간접 화법의 중간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사고와 행동은 화자에 의해서 언급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직접적 표현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대신에 다른 관점은 사전에 차단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분위기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체험화법을 통해서 독자는 주인공 지니아의 내적 감정을 생동감 넘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귀도와 로드리게스의 비밀스러운 연애 행각은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는 지니아의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을 냉정한 아이러니로 서술합니다. “여름”은 지니아에게는 사랑하는 남녀의 행복한 시간으로 이해된다면, 귀도에게는 예술가가 추구하는 색채, 창조성 그리고 영감의 의미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 사이에 도사린 소통의 단절입니다. 등장인물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만, 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발언들은 상대방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대화 도중에서 서로 어긋나게 울려 퍼질 뿐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몸을 탐하면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연인들의 생각은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향하면서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끔찍한 불행일까요?

 

(계속 이어집니다.)